▲ 오추마을은 옛날 갯가를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하면서 군사, 행정, 종교, 교육 측면에서 오랜 역사를 가졌다. 사진은 국사봉, 김홍영공적비, 마을유래비 등이다.

오추마을은 통일신라 또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마을로 역사가 깊다. 지금은 진월면 오사리 제방 안쪽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지만 옛날에는 섬진강을 바로 끼고 있었다. 갯가를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하면서 군사, 행정, 종교, 교육 측면에서 다른 어떤 마을보다 오랜 역사를 가졌다.

■ 군사·행정·종교·교육 측면  오랜 역사 간직
오추마을은 세종실록지리지 등 국가주요문헌에 오정소(烏頂所)라 기록되어 전하는데 서기 600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은 백제 사비(泗沘)시대의 37군 중 ‘오추골’로 삽평군 마로현에 속하였으며 당시 신라와 접경지로서 백제 경비군이 상주하면서 오추골이라는 지명이 사용·표기되었다.
당시 백제 순라군이 뒷산에 봉화대를 세우고 그곳에 초계하여 ‘국사봉’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며, ‘봉암 산성’ 축성은 오추골에 주둔한 군령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월포면사무소가 송금리로 이전하기 전까지인 1898년까지 이곳에 면사무소가 있었으며, 기독교가 오래전부터 들어와 예배당이 운영되면서 왜정시대와 6·25동란 시에는 갖은 박해를 당하면서 순교자가 배출되었고, 1920년 육영학당 양명학당이 세워지면서 이 고을에 신학문이 수용되어 운영되어 오다 1947년 진월중앙초등학교가 설립되는 모체가 되기도 했다.
오추마을의 옛 이름은 오정소(烏頂所)인데 이는 마을 입구의 산 형국이 까마귀 머리에 해당된다하여 이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름인 오추(烏騅) 역시 한자는 다르지만 마을의 뒷산 모습이 까마귀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이름한 것으로 전한다.
일설에는 이곳 산세(山勢)가 옛날 중국의 항우(項羽)가 탔다고 하는 준마(駿馬)같이 날렵한 말같이 생겼다 하여 오추마(烏騅馬)에 유래 되어 마을 이름을 오추(烏騅)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오추골 또는 오적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김홍영공적비와 오추골도전말
오추마을은 현재 진월면 오사리에 속한다. 하지만 오사리(烏沙里)는 본래 월포면(月浦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당시 오추리(烏騅里), 추동리(秋洞里), 사평리(沙坪里), 돈탁리(敦卓里)가 병합했으며, 오추(烏騅)와 사평((沙坪)의 이름을 따서 오사리(烏沙里)가 되었으며, 폐합 당시에 진월면(津月面)에 편입되었다.
오추 마을 한 어귀에는 특별한 공적비가 마련돼 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아동마을을 막 지나 오사배수펌프장 가기 전 길가에 행군수 김홍영공적비가 세워져 있는 것. 이 비는 홍수의 피해가 심했던 오사 신구평야에 제방을 설치하여 홍수피해를 막아 안전하게 경작토록 한 김홍영(金洪永) 군수의 공을 기리는 선정비로 1973년에 세워졌다.
오추마을에는 ‘양부자와 오추마’라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약 130여 년 전 삼천석지기 양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광양·구례·곡성·하동·남해에 토지가 있어 속칭 5골 부자였다고 한다. 어느날 도사가 와서 이 집에 말(馬)이 부엌 문턱을 넘으면 망한다는 말을 하고 사라지기에 말을 타고 추적해서 알아보려 했으나 어디론가 종적이 막연하여 못 찾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후 마(馬)씨 성을 가진 첩이 들어왔는데 재산을 몰래 마음대로 처분하여 가산이 탕진되자 부자 영감의 아들이 하도 억울해서 서울 남산에 가서 봉홧불을 올리다 궁궐에 끌려가 문초를 받고 삼수갑산까지 가서 귀향살이를 하고 온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이후 ‘오추골도전말’(큰 부자가 살던 고을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음)이라는 유행어가 생겼다고 이야기 되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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