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포마을은 광양컨테이너부두와 여수광양항만공사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원래 광양 8포 중 하나였던 하포항이 있었던 곳이다. 다른 포구보다 지리적으로 여건이 좋아 전남 동부6군의 해상교통 중심지로 통했으며, 세종실록지리지(1514년)에 나타난 골약소(骨若所) 관할지역으로 행정적으로도 역사가 있다.

■아래 쪽에 위치한 포구
하포마을은 고려말에는 ‘아랫개’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진지끝’으로 불리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마을은 고려(917~1392) 또는 그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300년대에 안몰대밭(지금 마을의 서쪽 아래) 밑에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이 부근에 장독대 터가 남아 있고 옹기와편,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임진왜란(1592년) 이후 지금의 마을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1872년 광양현 지도에는 이 지역이 광양현 골약면 하포리(下浦里)로 표기되어 있고, 1912년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광양군 골약면 장길리(長吉里) 또는 화포(花浦)라고 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장길리, 황곡리, 통사리, 별등리와 병합되어 광양군 골약면 황길리에 속하였다.
하포(下浦)라는 이름은 ‘아랫개’ 즉 ‘아래 쪽에 위치한 포구’란 뜻으로 지금은 사라진 상포촌(금곡마을 앞 갯가 지역)과 비견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당시 골약포가 2개의 포구로 나누어져 상포촌, 하포촌으로 분리되는데 이 마을은 하포촌(下浦村) 지역이었던 것이다. 
또 이곳을 장길리(長吉里), 진지끝, 화포(花浦)로 불리었던 것은 육지에 뻗어내린 산등성이와 그곳의 길이 바다 쪽으로 길게 쭉 나와 있는 형국이라서 ‘곶’의 의미를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선출해’ 큰포구 하포항
하포마을은 1912년 하포항이 개항하면서 여수와 부산은 물론 일본에까지 이어지는 전남 동부6군의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한창 하포항이 번창하기 시기에는 1914년 당시 도이리에 소재한 골약사무소와 경찰주재소가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그 당시 하포항의 중심지였던 장길나루터에는 시장이 개설되어 호황을 누렸다.
당시 광양읍-하포간 도로가 확충·정비되면서 광양읍 지역의 산물이 자동차로 이송되어 이곳 하포항에 집산됐으며, 옥곡·진상지역의 수산물도 옥곡 신촌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통해 이곳으로 모였다. 
특히 김, 뱀장어 등은 하포항을 통해 일본 등지로 수출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2년 이곳 하포마을에 하포공립 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이 지역이 행정·교육·교통·경제의 중심지로 더 큰 부상을 하게 된다. 
하포항이 당시 큰 호황을 누렸지만 1930년대 중반에 호남선 철도가 순천에서 여수까지 연장되는 순천·여수간 철도가 개통되자 여수항이 크게 활성화 되면서 빛을 잃게 됐다. 
1938년 골약면 사무소와 경찰주재소도 성황리로 자리를 옮겨갔고 하포항은 폐항됐다.
그 이후 1989년 전라남도 광양지구 출장소가 동광양시로 승격됨으로써 행정구역상 황금동·황길동을 관할하는 황금동사무소가 이곳 하포에서 개소했었는데 1995년 11월 25일 황금동과 성황동을 통폐합하여 골약동으로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하포마을은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홍선출해(弘船出海) 형국이라 하여 커다란 배가 바다를 향해 힘차게 출항하는 모습이므로 큰 항구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일부 주민들은 광양만의 여수 쪽에서 볼 때 하포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출항하는 배의 형국으로 보아 이곳 부근 지역을 포함한 황곡, 평촌, 하포 등 해안지역과 구봉산을 배경으로 한 지역을 포괄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하포마을을 중심으로 한 황금동 일대는 광양컨테이너 부두로 인해 대변혁을 맞이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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