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동마을은 2007년 동동마을에서 분리됐다. 사진은 마을전경, 송천사지회은장로비, 용문사, 2019년에 건립된 마을회관 등이다.

선동마을은 백운산 고로쇠약수제 단이 있는 동동마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위치상으로 바로 옆 마을이기 도 하고 한때 선동마을은 행정상으 로 동동마을에 속해 있다가 2007년 에 분리되어 독립마을이 됐다. 동동 마을에서 선동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백운산 고로쇠약수제단을 지나 선동 교를 건너서야만 들어설 수 있기에 두 마을의 분리는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마을회관도 동동마을에서 분 리된 지 12년 만에 새로 건립됐다.

■선인(仙人)이 사는 마을

선동마을은 1912년 행정구역 개 편 이전에 옥룡면 선동리(仙洞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 이름이 나타났다. 그 이전인 1789년경에는 옥룡면 심원촌(深院村) 관내 지역으 로 추정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조선시대 중엽 쯤 전주이씨와 이천서씨 두 가문에 서 통정(通政)이라는 벼슬과 진사 (進師)라는 벼슬을 가진 사람이 입 촌하여 마을을 형성했다는 말도 있 다. 선동의 이름은 이 마을 근처에 선 인무수혈(仙人舞袖穴)의 명당이 있 어 생긴 특정지명으로 선인(仙人)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선동(仙洞)이라 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이웃 마을인 동동(東洞)마을과 비교해 송천사 서 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이 마을 을 서동(西洞)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선동마을은 사람이 살기 전부터 이 지역에 절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계곡 아래에는 옛 절터인 송천사지 (松川寺址)가 있다. 백운산을 배경 으로 한 이곳 절터는 정확한 위치와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주민들은 나한 전지(羅漢殿址)라는 터를 알고 있다 고 전한다.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문헌 에서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1757 년∼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 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인 『여 지도서』 등 사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엽까지는 절이 있었 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후 한동안 폐사되었다가 19세기 읍지에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중창된 것으 로 추정되며, 그 이후 6·25전까지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사찰은 1950년대에 폐사되어 현재에 이르 고 있다.

■송천사지회은장로비와 용문사

송천사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 송 천사 터에 있는 송천사지회은장로비 (松川寺址悔隱長老碑)를 통해 알 수 있다. 송천사지회은장로비(松川寺址悔隱長老碑)는 조선시대 승려 인 ‘회은’ 관련 기념비로 동곡리 산 196-1에 위치하며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전체높이 292cm, 비신 높이 185cm, 비폭 76.2cm이며, 이 수·비신· 좌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수의 전면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 주를 가운데 두고 노는 모습이 조각 되어 있고, 후면에도 용을 비롯하여 게·개구리·자라 등이 새겨져 있 다. 비문에 따르면 회은장노의 선대는 남원에 거주하였고, 속성은 기씨이 며 자는 응준, 호는 회은이라 하였 다. 어려서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시 작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 란 때에 전라순찰사 이시방이 관군 을 동원하자 이에 호응하여 벽암대 사 각성이 일으킨 승병에 참가하여 참모로 활약했다. 그 뒤 조정에서는 회은에게 절충과 양호도총섭을 제수 하였고, 1647년에는 지렵지공으로 가선대부와 팔도도총섭을 받았다. 1660년(현종 1)에 자헌에 가자되고 승병대장이 되었으며, 1663년에 정 헌으로 특별히 가자를 받아 군무에 재임하였다. 또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용문 사라는 절이 있다. 용문사는 원효대 사가 금산을 찾아와 보광사를 짓고 뒤에 호구산에 첨성각을 세우고 금 산에 있었던 보광사를 이 곳으로 옮 겼다고 전한다. 용문사는 보광사의 후신으로 등장하는 사찰인 셈이다. 용문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승려들이 용감하게 싸 운 호국사찰로써 그 증거물이 아직 도 남아 있다. 용문사에 보관중인 삼 혈포라는 대포, 그리고 숙종이 호국 사찰임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 사 금패가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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