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신마을은 고려시대부터 역이 있었던 마을로 가장골로 불리었다. 사진은 위에서 부터 마을전경, 마을 사랑방, 마을표지석, 마을회관, 동천, 익신일반산단 등이다.

익신마을은 광양경찰서에서 초남 방향으로 가는 길 왼편에 위치한 마 을이다. 마을입구에 마을회관이 자 리하고 있으며, 마을을 알리는 표지 석도 바로 옆에 있어 마을을 쉽게 찾 을 수 있다.

특히 이 마을은 여느 시 골마을과 다르게 가구 수가 많은데 오래전부터 이 마을이 발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골로 불리기도 익신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사라곡리(沙羅谷里)지역으로 추 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사 라곡면(沙羅谷面)에 속했고 1789년 호구총수에는 사곡면(沙谷面) 익신 촌(益申村) 지역이었다.

익신마을은 약 330년 전 청주한씨 (淸州韓氏)가 가장 먼저 입촌했다고 전하는데 고려시대에 이미 이 마을 에 익신역이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실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한때 가장마을이라 불리 었는데 바닷가 가장자리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게 됐으며 현재 도 가장골이라고 부르는 주민들이 많이 있다.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마을 지세가 활(弓)의 형국이라고 한다.

마을 앞 도로가 활줄이며, 마을모 습은 활, 활을 당기는 곳 즉 좀통은 마을회관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마 을 뒷산에 위치한 호랑이 바위를 향 하여 활을 당기는 모습이라 전한다.

현재 마을 앞 도로 건너편에는 익 신일반산단이 들어와 시골마을과 사 뭇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광양동천이 흐르고 있다.

■익신역과 한군협에 대한 일화 익신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익신역 이 있었다고 전한다. 익신역(益申驛) 은 당시 중요한 교통·통신기관으로 서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를 전달하 고 관수물자를 운송하며 관원 왕래 에 따른 관원의 숙박편의 등을 제공 하는 여러 가지 기능을 담당했는데 한말에 폐지됐다.

문헌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는 이 곳의 역을 분신(盆新)이라 했고, 조 선초기에 들어와 분신(盆申) 또는 익 신(益申)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을에서 전하는 이야기로는 통일 신라 말 고려가 아직 삼국을 통일하 기 전에 옥룡사에 있던 도선국사가 익신마을 뒤쪽에 있는 절 이름을 일 신사(一新寺)라 했는데 그 당시 절 이름을 따서 일신(一新)이라 하였고, 그 뒤 익신역의 각종 노역을 더욱 잘 하라는 뜻으로 익신(益申)으로 바꿨 다고 전한다.

또 이 마을에는 한군협에 대한 일 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군협은 1894년(갑오년) 12월 8 일 사곡접주(동학의 교단책임자)가 되어 포살됐다고 한다.

그는 사곡리 본정마을로 피신했다 가 체포되어 유당공원에서 기둥에 묶인 후 짚으로 둘러 싸여 화형을 당 했다고 한다.

전하는 일화에 의하면 그는 죽어서 도 광양인의 기개를 떨쳤다고 하는 데, 그는 동학란에 가담한 죄로 사형 에 처해졌는데 형장에서 그의 목을 치자 땅에 떨어졌던 머리가 다시 올 라붙어 형리와 관리들에게 호령했다 고 한다.

그는 사후에도 여수, 구례, 순천 등 의 친구들에게 차례로 나타나 함께 술을 마시고 술값까지 치르고 사라 져 친구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는데 ‘광양사람 귀신하나가 순천사람 셋을 당한다’는 말도 이러한 일화에서 유 래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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