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창마을은 옛날 소금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 전경, 하동정공주현 공덕비, 솔밭공원 내 정자, 마을회관, 감호정 순이다.

염창마을은 구례방향으로 가다보면 섬진강으로 합쳐지는 중대천이 나오기 전의 마을이다. 다압의 마을들은 비교적 섬진강을 따라 쭉 늘어진 길가에 형성된 반면 염창마을은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섬진강 풍경을 바라보기에 더욱 좋다. 마을을 가리키는 이정표에도 전망 좋은 곳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소금창고
염창(塩倉)마을은 적어도 고려시대(918~1392년)부터 이 지역에 소금을 보관하고 출납하던 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실록지리지(1452)에 의하면 이곳 마을에는 염간(塩干:조선시대 제염장에서 작업을 하던 사람)이 34명이고, 봄가을에 소금을 공급한 물량이 214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당시 염창주변에 상당히 큰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염창마을도 그 시기부터 발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염창마을의 이름도 그 당시 소금창고가 있었다는 데 연유해 그대로 사용된 것이다. 조선 초기 광양지역의 소금 생산지인 노을도소(奴乙道所:진월면 오사리), 고지포(古之浦:골약동 고길마을로 추정)에서 소금을 섬진강 수로를 이용하여 이곳으로 가져와 보관해 두었고, 섬진강을 이용하여 공물(貢物)로 바치기도 했으며, 구례 등 섬진강 상류로 운반하기 위해 강 건너 경남 화개장터로 소금을 실고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회관 바로 옆에는 하동정공주현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마을회관을 벗어나 매각마을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일명 족보바위라고 부르는 설통바위가 있다. 바위 위쪽에 작은 사각형으로 구멍이 나 있는데, 김해김씨의 족보를 난중에 피신하여 넣어두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비들의 교류공간 - 감호정
염창마을은 마을 내 또 다른 마을이 존재한다. 행정리상으로 염창마을은 염창과 매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매각마을은 본래 염창마을의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다압면사무소로 가는 방향에 있는 아랫마을을 뜻한다. 
매각마을의 설촌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염창마을과 같이 마을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각마을은 제14연대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이 아군에 쫓기어 백운산으로 잠입한 후 이 마을에 자주 침입해 피해를 줬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어쩔 수 없는 피해를 당한 주민들의 애환이 깃들어져 있다.
염창마을로 들어서기 전 섬진강 일대에는 솔밭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이 근처에 옛날 여러 고을에서 모인 선비들이 시를 읊고 교우했던 감호정(鑑湖亭)이 있다. 1925년 간행한 광양군지에 보면 감호정은 현 동쪽 70리에 김지섭이 창건했으며, 백운산 아래 섬진강 위에 있어 산수가 아름답고 화목이 기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천 황현이 지은 ‘감호정 중건기’에 의하면 1839년 김응란의 조부가 마을의 누추함을 걱정해 감호정을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감호정을 서숙(書塾), 즉 글방으로 삼았는데, 광양고을은 물론 구례. 곡성. 보성. 남원. 승주. 하동. 남해 .사천 등지에서 선비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매천 황현 선생도 이곳을 통해 많은 선비를 만나 교류했다.
감호정은 여순사건 이전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는데 최근에 객지에 있던 후손들이 그 뜻을 기리고 남기고자 이곳을 개보수하여 건물을 새로 단장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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