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동마을은 옛날 녹청자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던 마을로 마을입구에는 자라바위가 마련돼 있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표지석, 당산나무, 자라등, 마을회관, 자라바위 순이다.

기동마을은 성황동을 지나 황길역으로 향하다 보면 통사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기준으로 우측에 있는 벌등마을과 갈림길 좌측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본 마을을 합친 마을이다. 벌등마을과 통사마을의 경계지역이 되는 갈림길을 구문장이라고 부르며, 기동마을 입구까지는 마을버스가 들어온다.

■기동과 벌등 
기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골약리(骨若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골약면(骨若面) 지역에 속했다. 학자들 간에는 마을 이름인 기동(基洞)과 이곳 지형적 여건으로 보아 고려 또는 그 이전에 특수행정구역인 골약소(骨若所)가 있었던 지역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기동마을은 달성서씨 학유공파보(達城徐氏 學諭公派譜)에 의하면 1821년(조선순조 신축년) 달성서씨 서유곤(徐有坤)이 당시 순천군 서면(西面)에서 처음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한다. 
한편 벌등마을은 이천서씨(利川徐氏) 원숙공파(元肅公波) 가운데 문의공파(文毅公波)의 한사람이었던 서유화(徐有和)가 처음 이 지역에 입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벌등마을은 바닷가의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문헌상 기록에 의하면 기동마을보다 먼저 마을이름이 나타났으며, 1910년을 전후하여 기동마을은 벌등리에 소속됐다가 그 이후 기동마을이 점점 커지자 거꾸로 벌등마을이 행정리상 기동마을에 소속됐다.
기동(基洞)마을은 ‘텃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를 한문식으로 그대로 써서 ‘본래 예부터 있었던 마을터’란 뜻도 있으나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장소 고을’이란 뜻이 담겨있다. 
벌등(筏嶝)은 ‘뻘등’에서 유래된 말로 비교적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는 산등성이에 자라잡은 고을이란 의미를 지닌다.

■자라바위와 녹청자 가마터
기동마을 입구에는 버스정류소가 있으며 그 옆에 석조거북이가 자리해 있다. 이 석조거북이는 일명 ‘자라바구’라고 부르는데 그 크기가 전체 길이 153cm에 높이 39cm이다. 
이곳에 석조거북이를 만든 사연은 이 마을 앞에 자라등(거북등) 형국의 산등성이가 있는데 약 90년 전 성황, 하포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이 산등성이를 잘라버리자 당시 마을 주민들이 거북이의 노여움으로 마을에 재앙이 있을까 걱정되어 이선달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돌에 거북이 형상을 조각하여 이곳 자라등 부근에 놓게 하여 마을의 재앙을 없애고 마을의 융성함을 바라는 뜻을 표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석조거북이가 있는 앞산의 동쪽 하단부에는 조선 전기에 녹청자(祿靑磁)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다. 
이곳의 녹청자 요지는 조그마한 밭을 경작하면서 야산의 하단을 굴착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 단애면에 녹청자편과 가마의 벽편들이 노출되어 산재돼 있다. 
녹청자의 편년은 인천 경서동요지와 해남 진산리요지와 비견하여 참고하면 고려 전반기(11세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황길 기동마을의 녹청자요지는 현재 수습된 녹청자편들로 볼 때 구연부의 기형이 외반된 점이 심해서 조선 전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녹청자 조사 자료를 볼 때 녹청자 편년은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정확한 편년은 발굴조사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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