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 진압명령 거부한 좌익 군인들의 봉기… 반군 토벌 과정에서 숱한 민간인 군경에 의해 학살

 

74년 전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시 신월동에 주둔한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군인들은 다음 날인 20일,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곧이어 광양을 포함한 전남 동부지역까지 점령해 나갔다. 이에 전라남도 동부지역에 그 여파가 미쳤다. 
실제로 여수, 순천은 명백히 14연대 군인들이 점령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거의 지나가는 수준이었고, 대신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었던 인민위원회라는 주민 자치조직이 등장했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했고, 일주일만인 27일 대부분 지역을 탈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두고 여순반란사건 또는 전남반란사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1995년부터 국사 교과서에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명명됐으며, 일반적으로는 여순사건이라 부른다.

■제14연대의 봉기와 광양의 피해
여순사건의 발단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 무장봉기가 일어나면서다. 제주 무장봉기의 진정세가 보이지 않자 국군과 경찰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일부 병력을 제주도로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1948년 10월 19일, 지창수를 비롯한 제14연대 병사들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러 갈 수 없다며,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14연대 봉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제주도 파병 반대였지만, 이전부터 쌓여왔던 군과 경찰 간의 갈등도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경찰은 경찰 보조병력으로 창설된 국방경비대를 깔보았고, 국방경비대는 경찰을 민족과 국가를 팔아먹은 매국노 친일 집단으로 비난했다.
10월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오전 여수와 순천으로 확대됐다. 정부는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했고 7개 연대 총 12개 대대 병력을 투입해 진압에 나섰다.
순천에서는 경찰관들이 반군을 막으려 했지만,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파견대가 봉기에 합류하여 저지에 실패했다. 
며칠 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 벌교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광양에서는 경찰이 10월 20일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순천으로 향하던 도중, 반군의 기습을 받아 퇴각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억울하게 여긴 경찰은 앙갚음하기 위해 광양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 혐의자들을 덕례리 주령마을 반송재로 데려가 총살시켰다. 
일명 반송재 학살사건이다. 이후 10월 22일 봉기군이 광양에 도착해 15연대의 진압군을 기습했다. 이로 인해 15연대의 광양진입이 실패로 돌아갔고 광주 주둔 12연대가 투입됐다. 
10월 23일에는 광양에 정찰부대가 파견돼 군청과 경찰서를 점령한 좌익세력을 습격, 70여명을 사살하고 10여명의 좌익인사를 검거해 총살했다.
이 과정에서 백운산을 끼고 있는 봉강, 옥룡, 옥곡, 진상 일대에서 상당수 주민들이 반군색출을 명목으로 희생 당했다. 이념과 무관하게 이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반군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아 지목을 당하면 반박할 기회도 없이 현장에서 총살을 당한 것이다.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되자 여순사건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1000여명의 반군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 기존의 지방 유격대와 합류해 저항활동을 이어간다.
이들의 활동은 6.25전쟁이 끝난 1954년 4월까지도 계속적으로 이어졌고, 지리산과 백운산 부근에서 무력충돌이 끊이지 않으면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다. 

■여순사건의 영향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이승만 정부는 내부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물리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군대와 경찰을 정비했다. 
경찰관을 증원하는 한편 우익 청년단체들은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고, 학교에는 군사훈련을 위해 학교별, 지역별로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군대에서는 좌익세력 색출을 위한 숙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9년 7월까지 국군 병력의 약 5%에 이르는 총 4,749명이 숙청됐다. 
또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세력 색출을 위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며 반공국가를 구축했다. 
국가보안법은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에 달하는 11만 8천 명에 적용될 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1960년 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가 출범했지만,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진실 규명은 물거품이 됐다. 
오히려 군사정권은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이적단체로 몰았다.
유족들은 어쩔 수 없이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이후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뒤 민간연구기관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50주년을 맞은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이후 여러 차례 여순사건 진상규명 등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6월, 21대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됐다. 
특별법에는 국무총리 소속의 위원회를 설치해 2년간 진상조사를 실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순사건은 국군이 국가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반란’에만 초점이 맞춰서 있었지만 이제는 ‘반란’ 보다는 ‘민간인 희생’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따라서 여순사건의 피해자도 1948년부터 1954년까지 희생당한 이들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 진상규명 따른 피해신고 ‘부족’
여순사건 특별법’의 공식적 명칭은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다. 여순사건 희생자와 유족, 도민의 염원을 담아 지난해 6월 29일 국회를 통과, 올해 1월 21일부터 시행됐다. 
특별법이 제정되자 인근 도시들은 여순사건에 대한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광양에서도 여순사건광양유족회와 광양여순10.19연구회를 중심으로 관내 22개 단체로 구성된 광양여순10·19시민연대가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1주년을 맞아 주철희 박사의 강연과 여순항쟁 역사화전으로 시민에게 여순사건을 알리고 있다.    
박발진 광양여순10·19시민연대 운영위원장은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내년 1월 20일까지 진상규명 및 희생자·유족 신고·접수를 받고 있지만 실제 신고 건수는 너무 부족하다”고 밝혔다.
광양지역에 발생한 피해 추정치는 800건 이상인데 신고한 건수는 200여건에 불가하다는 것. 
박 위원장은 “기존 조사를 할 때에는 피해자 이름까지 거론되며 누구네 가족들이 그렇게 희생을 당했네 하면서 증언으로 20여명이 카운터 됐지만 실제피해 신고는 4~5명만 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피해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피해신고를 적게 하고 있는 것”이라며, “타 지역으로 가족들이 대부분 떠나버렸거나 희생을 당해 대가 끊길 수 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여순유족회에서 활동하신 분들은 보상을 받았다고 하면서 신고를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번 조사는 보상에 관한 접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상규명을 위한 피해를 조사하기에 유족들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1949년 전라남도 통계에 의하면 1만 1천여 명의 희생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지 못한다”며, “구체적인 신고가 있어야 피해보상에 관한 이야기도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여순사건 진실규명
박 위원장은 지난달 21일 광양 락희호텔에서 있었던 유족들의 증언을 듣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광양유족회와 연구회가 주최로 유족정담회를 가졌는데, 그동안 유족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는 것.
그가 기억하는 유족 증언은 “아버지가 여순사건으로 돌아가시고 나니깐 학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학교 갈 형편이 됐다고 해도 똑똑하면 아버지 꼴이 나는 거라며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제대로 가지 못해 여순사건의 구조적 배경이나 전개과정에 대해 잘 모른다. 지금까지 남 앞에 나서서 말을 하지 않고 오직 농사만 짓고 살았다. 당시 10살이던 나이가 이제는 84세가 됐다”는 내용이다.
박 위원장은 “그동안 가슴속에 통한의 눈물을 삼키고 살았던 가족들에게 이제 와서 무엇으로 보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여순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길이 그들에게는 보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국가에 소속된 군인으로부터 발생된 사건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면서 “여순사건을 가장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학살’이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광양시에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앞장서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이 빠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민관협의체가 우선적으로 구성돼야 하며, 민관협의체 내에는 전담 시 공무원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유족 발굴 및 유족 트라우마 교육도 순조롭게 진행이 된다고 설명했다.
박 위원장은 “앞으로 여순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실을 밝혀낼 것이며, 아울러 민주시민 교육을 통해 시민들과 자라나는 미래세대들에게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알리는 데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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