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기념관, 정병욱 선생과의 인연 자세히 소개…망덕포구 정병욱 생가 활용 방향 재검토 필요

 

망덕포구 무접섬과 그 인근에는 윤동주 쉼터와 윤동주 시인의 시가 적혀있는 윤동주 시(詩)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 윤동주 관련 콘텐츠가 조성된 것은 망덕에 소재한 정병욱 가옥에서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광양시는 ‘민족시인’ 윤동주라는 문화 브랜드를 선점하고 관광과도 연계시키겠다는 방침이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두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을 잡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의 시비다. 그 뒤로 남산타워와 서울시내의 모습이 들어온다.

■윤동주 영혼의 터
서울 청운동 인왕산 자락 청원공원 내에는 윤동주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부암동과 청운동을 잇는 서촌의 끝으로 조선시대 중인들의 문학인 위항문학이 꽃핀 곳이며, 1930년대부터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노천명과 윤동주, 이상, 소설가 현진건 등 근대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당시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며, 종로구 누상동에 살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했는데 이때 후배 정병욱도 함께 있었다. 당시 윤동주는 청운동과 누상동 일대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렸으며,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작품이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청운동 청원공원에 윤동주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자리하게 됐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는 윤동주 영혼의 터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야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적인 시비 뒤로 남산타워와 서울시내의 모습이 한꺼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언덕 입구에 조성되어 있는 윤동주문학관은 2012년 7월 용도 폐기된 청운 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하면서 만들어졌다. 문학관을 통해 윤동주 시인의 민족정신과 저항정신, 그리고 시 세계를 기념하고자 했다.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1전시실은 윤동주 시인의 삶을 9개 전시 공간으로 나눠 보여준다. 시인의 일생을 시간 순으로 배열한 사진 자료와 친필원고 영인본, 또 만주 용정에 있던 생가에서 옮겨 놓은 ‘나무 우물’이 마련돼 있다.
2전시실은 ‘열린 우물’이라는 주제로 윤동주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모티프를 얻어 물탱크의 상단을 개방하고 하늘과 바람과 별이 함께하는 중정으로 만들어져 있다. 
3전시실은 ‘닫힌 우물’이라는 주제로 물때가 남은 거친 벽면과 두꺼운 철문을 이용해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있었던 감방을 연상케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시인의 눈감았던 그 공간의 정서와 함께 시인의 일생과 시 세계를 담은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다.
이처럼 윤동주문학관은 시대를 아프게 살다 간 윤동주 일생 전반을 보여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없다고 느낄 수 있지만 윤동주가 시상을 떠오르기 위해 걸었던 길을 걸으며 생각하며 헤아렸던 별을 똑같이 헤아릴 수 있다.

▲ 청운 공원 입구에 마련돼 있는 윤동주 문학관의 모습. 윤동주문학관은 폐기된 청운 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하면서 만들어졌다

■윤동주 기념관에서 만난 정병욱
윤동주 문학관이 윤동주 일생 전반을 보여줬다면 윤동주 기념관은 시인 윤동주의 삶과 문학 전반을 보여준다. 
윤동주 기념관은 연세대학교 안에 위치해 있으며 윤동주 시인이 재학 당시 머물렀던 기숙사 ‘픽슨관’에서 윤동주 시인의 유품과 함께 인간 윤동주를 소개하고 있다. 이 기념관은 예약제로만 운영하기 때문에 필히 예약을 해야 하며, 관람시간은 1시 30분에서 3시 30분까지 2시간 정도다. 예약 시 도슨트의 해설을 선택할 수 있다.
윤동주 기념관은 총 3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1층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남긴 유품을 중심으로 시대의 역사와 감성을 체험해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다. 총 7개의 전시실에는 윤동주 아카이브를 서랍형으로 전시하면서 관람객들이 직접 열람해 볼 수 있게 했다.
2층은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서적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도서관이다. 윤동주와 관련된 모든 출판물들이 이곳에 총체적으로 모여 있다.
3층은 다락방 느낌이 나는 공간인데 이곳에 정병욱 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정병욱 선생은 윤동주 시인의 벗으로 연희전문 시절 기숙사와 하숙집에서 2년간 함께 지냈으며, 윤동주 시인으로부터 받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광양 고향집에 숨겨 지켜내면서 그 시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했다.
정병욱 선생 탄생 100주년 특별전에는 정병욱 선생과 관련된 사진과 서류, 훈장 등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 정병욱 선생이 윤동주 시인 추모 10주년을 맞아 방명록에 기록한 ‘언니를 따라 죽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정병욱은 1955년 증보판 시집을 출간하는 일과 더불어 윤동주를 알리는데 힘쓰면서 윤동주 시인 사후에도 그 인연을 길게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 윤동주 시인 추모 10주년 당시 정병욱의 방명록.

■윤동주와 정병욱
백영 정병욱 선생은 1922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34년부터 1939년까지는 동래고보에서 수학을 했고 연희전문에 입학한 시기는 1940년이다. 그가 연희전문 입학 당시의 학적부에 비로소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 22번지가 주소로 기재되어 있었다.
정병욱 선생은 연희전문 1학년 때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기거했는데 당시 가장 가깝게 지낸 이가 바로 윤동주 시인이었다. 
이후 이들은 누상동과 북아현동을 전전하며 하숙을 했고 1941년에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원고를 넘긴 때는 바로 이 무렵인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 사이로 추정된다. 
정병욱도 1944년 1월말 학병으로 끌려갔다. 징집되기 직전 어머니에게 윤동주 시인이 남긴 원고를 넘기며 보관해 달라고 당부를 했다. 
그러던 사이 1945년 2월 윤동주 시인은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살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유고를 항아리에 담아 마룻바닥 아래에 묻었고, 광복까지 어렵게 보존하면서 그의 시가 광복 후 1948년에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정병욱 선생은 이렇게 윤동주 시인과 가장 중요한 시기를 함께 했다. 
윤동주 시인이 일제 암흑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불을 밝히고자 노력했듯이 정병욱 선생도 자신의 자리에서 노력을 다했다.

■망덕포구와 정병욱 가옥의 활용
광양시는 최근까지 진월면 망덕포구에 있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41호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정비하며 정병옥 가옥이 관광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정비가 된 이후에도 그전과 마찬가지라는 의견이 있다. 낡은 부분의 시설정비가 있었어도 지나가는 시민들은 밖에서 볼 때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래도 규모가 달라져야 하는데 힘이 실린다.
다른 국가등록문화재의 경우 마당을 포함한 가옥이 별도공간으로 존재하고 주차장까지 추가로 조성되면서 쉽게 눈에 띄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광양시도 이와 같은 고민을 하고 문화재청과 논의를 하면서 정병욱 가옥의 발전 방향을 생각했다. 그 결과 정병욱가옥을 포함한 그 일대를 광양시가 구입하고자 했으나 소유주의 생각차이가 있어 무산된 상태다.
정병욱 가옥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재지만 사유재산이다. 등록문화재는 우리나라의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문화유산 중 보존 및 활용 등을 위하여 특별히 인정된 문화재지만 소유자의 동의가 있어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현재 정병욱 가옥에서는 소유자가 생활을 하고 있어 이 부분의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병욱 가옥을 제외하고 정병욱 선생을 알리는 어떠한 장소도 콘텐츠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예로 윤동주 공원은 있어도 정병욱 공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윤동주와 관련해 정병욱 가옥이 힘을 받으려면 윤동주 시인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병욱 선생도 함께 알려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와 정병욱을 함께 회상할 수 있는 공간이 추가적으로 필요해 보이며, 전문적인 학자들과 유족이 함께 활동하는 윤동주 정병욱 학회도 만들어져 정기적인 학술대회가 광양에서 열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양재생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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