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흥 남 / 한려대 국문학 교수

전 흥 남 / 한려대 국문학 교수

 

필자는 올해로 어머니를 여읜지도 어느덧 7년째 접어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년쯤 되었을 때다. 한번은 꿈 속에서 어머니가 여러 가지 반찬을 챙겨 주시며 맛있게 먹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배 고픈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당신이 배불리 먹은 것처럼 기분이 마냥 좋은 표정이었다. 마침 그날은 딸이 목포에서 중학생 전국 영어경시대회를 치르기로 한 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오늘도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당사자인 딸은 물론이거니와 아내에게도 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만, 내 예감은 그날 딸이 빈 손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딸은 대회에서 내 예감대로 대상을 탓다.

돌아가신 뒤에도 이렇게 어머니와 교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지금은 꿈속에서나마 뵈는 빈도수도 줄어들어 아쉬움이 크다. 필자는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의 얘기로 다소 에둘러 왔지만, 문순태의 단편소설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는 생전에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와의 갈등을 통해 어머니의 삶과 추억이 정교하게 교직되어 있는 작품이다.

문순태의 소설집 『울타리』에는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외에도 「은행나무 아래서」, 「느티나무와 어머니 」등 늙으신 어머니의 삶과 추억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실제로 작가는 구순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어머니의 존재 또는 삶의 역정(歷程)을 통해 삶의 진정성을 핍진성 있게 그린 경우로 짐작된다.

이 소설은 어머니가 머문 자리에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는 아내와 ‘나’와의 갈등이 주요 모티프다. ‘나’ 역시 어머니의 냄새를 모르는 바 아니나 아내처럼 맡기 거북할 정도는 아니다. 아내는 이런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결국 아내와의 갈등의 골은 깊어간다.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집에 있는 화초와 분재를 다 뽑아버리고 어머니가 그 화분에 고추와 가지 모종 등을 심은 사건이다. 어머니에게 화초는 산이나 들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흙 한 주먹이 아쉬워’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의 살아온 날과 아내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내는 아내대로 어머니의 냄새를 몰아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쓴다. 결국 아내는 처형의 병구완을 핑계로 처형 집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나’는 아내를 데려오고, 어머니의 냄새를 없애게 위해 어머니를 동생 집에 며칠만이라도 모셔다 드리자고 제의하는 것으로 현실화된다.

그런데,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아파트의 한 구석에서 보따리를 발견한다. 보따리 속에는 “녹슨 호미와, 오래된 손저울, 함석 젓 주걱, 판자로 짠 손때 묻은 되, 때에 전 흰 다후다 천의 돈 주머니, 짙은 밤색의 나일론 머풀러, 땟국에 전 앞치마 등이”(35쪽) 들어 있다. 또한 “검정 고무줄로 친친 묶여 있는 돈주머니를 풀고 그 속에서 손바닥만 한 수첩”도 발견된다. 화자인 ‘내’가 대학 다닐 무렵 도붓장수를 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하며 작성했던 빛 바랜 외상장부 수첩인 것이다. 어머니의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보따리’, 역겨운 냄새의 근원지는 바로 그 보따리로 드러난다.

보따리 안에서 나온 자질구레한 물품들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의 향기임을 ‘나’는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과거의 기억이 묻은 물품들을 간직하고 사는 어머니의 행동이, 젊은 사람의 눈에는 노망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어머니의 과거를 아는 ‘나’에게는 사람의 향기로 느껴지는 것이다.

각기 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머니의 존재(부모의 존재감)은 자식들로 하여금 용기를 북돋아 주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어머니도 세월의 두께를 비껴갈 수는 없을 터, 나이가 들면 병마에 시달리기도 하고 판단력도 흐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의 공유는 자식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삶의 원형(原型)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상의 온갖 풍파와 시련을 견디고 감내할 수 있게 하는 충전소다.

이런 점에서 문순태의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는 노년소설의 수작(秀作)에 머무르지 않고, 쉽게 읽혀지지 않는 작품으로 오래도록 머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네 삶 속에서 어머니의 절절한 삶이 녹아있기에 그 여운(향기)가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 건 아닐까. 요즘 들어 부쩍 어머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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