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식(광양관세사무소 대표)

나는 정읍시 태인면 매개리의 약 30호 되는 상당히 큰 부락의 한 농가에서 농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님은 진실한 기독교신자로서 외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신 가정에서 자랐고 전주 기전여학교도 3년 동안 다닌, 인자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6.25 동난 때에는 형님이 경찰관이었는데 후방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시골집 근처에서 도피생활을 하셨는데, 그 여파로 가옥도 소실되었으며, 어느 밤에는 인민군들이 3번이나 들어와 집안을 구석구석 수색하곤 하였다. 특히 형의 칼빈소총과 대검을 집 뒷뜰에 어머니께서 손수 파묻었는데, 항상 이가 조마조마 하였다.

하루는 밤에 형이 집에 오자 어머니께서 닭을 잡아 형에게 주었는데, 아침에 마을의 여성동맹원들이 들이 닥쳐 닭고기가 든 솥을 보고, 형님을 찾아내라고 성화를 부리면서 우리식구 모두를 산으로 끌고 가는 도중이었는데, 마을 끝부근에서 형의 친구이며 마을 인민 위원장이신 권선생께서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날 밤으로 집을 떠나 형이 근무하는 김제 쪽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 후 나중에 수복후 형은 권선생을 자기 집에 숙식 시키면서 자수시켜 나중에는 교장까지 하셨다. 6.25 동난 중에서 나의 어머님은 슬기롭게 행동하시여 우리 식구가 희생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김제로 피난 온 뒤에 어머님은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시기 위해 포목전을 하셨는데 근처 지방 도시로 트럭에 큰 포목뭉치를 싣고 다니며 5일장에서 판매하시여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리셨다.

그 뒤 형이 논밭을 마련하여 논농사와 밭농사를 하셨는데, 어머님은 항상 열심히 일하셨고, 특히 김치 담그는 솜씨가 뛰어나 동치미는 땅에 묻었고, 고추장, 된장도 어찌나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담근 김치만 있으면 밥을 얼마든지 먹곤 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는 S대 입학시험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면서 집안 농사일을 돌보며 입시공부를 하였는데 좋은 대학보다 대학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장학특전을 받을 수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려고 진로를 정하고, J대, K대에 원서를 제출하고 J대에 1차로 응시하게 되었는데, 목표한대로 ‘64년도 전교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는 어머님의 지속적인 기도 덕분이었다. 매일 새벽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마음이 하느님께 전달되어 이룩된 것이었다.

서울로 이사한 뒤에 나는 대학 졸업 후 S대 행정대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대학원 재학 중에도 어머님께서 일수놀이를 하시며 나를 학교에 다니게끔 하셨다.

양심상 마음에 거리끼시어 사전에 목사님에게 양해 말씀드리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대학원 졸업 전에 7급 행정직 시험에 합격하여 졸업 후 바로 문교부 총무과에서 일반 서무와 보안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산하기관이 많아 이첩 문서 업무가 많은데다, 옆 친구가 장관 관인을 찍는데, 그 당시에는 각 대학 졸업생마다 문교부 장관의 학위등록증을 발급하고 있어 졸업시즌에는 거의 밤 12시까지 관인 찍는 일에 같이 동참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10회 행시에 200명이 합격하였는데, 나는 이때 불합격하여 큰 충격을 받고 문교부 다닌지 9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다시 행시공부를 집 근처 독서실과 남산시립도서관을 다니며 공부하였는데, 이때에도 어머님께서 뒤를 보아 주시고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다. 어머님은 서울 불광동 은평교회 권사님이셨고 구역 권찰이시기도 하신 독실한 신자이셨다.

집에서 공부한지 2년 만에 어머님 기도 덕분으로 다행히 14회 행시에 합격하였던 것이다.

나의 결혼도 어머님이 손수 함에 들어갈 다이어반지, 금목걸이며 팔찌 등을 마련하여 주셨고 결혼을 위해서도 헌신적으로 기도하셨다. 그리하여 지금 처와 만났는데 지금의 처도 원래 불교신자였는데, 지금은 얼마나 열심인지 교회 근처로 집을 옮겨 열심히 기도하며, 성가대에 봉사하며 권사로서 봉사하고 있다. 특히 자식들의 교육이나 진로, 결혼 등에 극성스러울 정도로 헌신하고 있다.

이는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님의 염원과 기도가 지금의 처도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다른 자식들도 교회에 잘 나가고 있는 듯싶다.

어머님은 73세에 소천 하셨는데, 당시 교회 목사님도 큰 별이 떨어지셨다고 하셨다.

살아생전에 효도를 하지 못했지만 평소 소원이신 결혼도 하였고, 첫아들 출생한 것도 보셨으며, 부산에 근무 할 때 한번 부산 집에 오셔 태종대며, 해운대, 동래 등을 다니며 안내한 것이 지금은 큰 위안이 되고 있다.

어머님과 아버님의 무덤은 고양시 운정에 있는 은평교회 묘원에 나란히 묻혀 계신데 비석도 세웠고 앞에는 향나무 3그루도 심어 양지 바른 곳에 묻히셨다. 그래서 어머님 기일인 사월초파일과 팔월 추석에는 처와 애들과 함께 성묘를 하곤 하는데, 형님 내외분들도 살아생전에는 꼭 음식을 장만하여 오시곤 하셨다.

나는 최근에 더욱 어머님이 그리워지고 진정 나를 위해 희생하시고 항상 기도해 주신 것에 대해 커다란 고마움과 존경을 표하고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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