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소강국면에 놓여있던 9월 30일, 명나라 수군 유격 왕원주를 비롯한 몇몇 장수들이 전선 1백여 척과 증원 병력을 거느리고 진에 합류하여 조명 연합수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10월 1일, 총병관 진린 도독이 순천에 있는 유정 제독을 찾아가 수륙협공작전계획을 상의하고 돌아와 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수립 했다.

다음날 10월 2일,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 되었다. 조명 수군은 빗발같이 쏟아지는 적탄을 무릅쓰고 고니시가 있는 왜교성 60보 앞까지 접근하여 맹공을 가해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한사리 물때라 왜성 바로 아래까지 접근이 가능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유정 제독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아 1차 공성(攻城) 때와 마찬가지로 왜성에 결정적 타격은 줄 수가 없었다. 고니시와 유정제독 간에 모종의 밀거래가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조실록에 보면 도원수 권율과 좌의정 이덕형이 올린 급보가 기술되어 있는데 “유정 제독이 싸울 의사가 없는 것 같다”고 보고했던 것으로 미루어 수륙병진을 통한 왜교성의 공략은 처음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참 왜성을 공격하고 있는 사이에 조수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광양만의 조수상황을 보면 한사리 때는 대략 오전 11시경 만조를 이뤘다가 썰물이 시작되어 오후 3시경에는 간조가 절정에 이른다. 전술한바 있지만 광양만은 간조가 되면 협수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펄이 들어나 작은 어선조차 다니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썰물이 시작되면 모든 전선은 공격을 멈추고 장도와 묘도 해협으로 이동해야한다.

이순신 함대는 명 수군과 연합하여 오전 6시 밀물을 따라 왜성에 접근, 정오까지 맹공격을 감행하다가 썰물이 시작되자 작전상 퇴각을 단행했다. 비록 어영담 장군은 없었지만 이 지역의 물길을 잘 아는 광양 수군들의 조언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수군들은 전공에만 매달려 머뭇거리다가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날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는 많은 적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날 전투에서 사도첨사 황세득이 적탄을 맞아 전사했다. 그런데 전사한 황세득 첨사는 이순신 장군 부인의 사촌 오빠, 즉 처 종형이었다. 뿐만 아니라 황 첨사는 1583년부터 2년간 25대 광양 현감을 역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은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조문했다.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슬픔을 억누르면서 “세득은 국사에 죽었으니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이분의 충무공 행록은 기술하고 있다.

참으로 이순신 장군다운 대답이었다. 무엇이 욕된 죽음이고 무엇이 영광스러운 죽음인지 선공후사의 대의를 강조한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10월 2일 1차 전투에 이어 10월 3일 2차 전투가 개시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일기인 무술년 잡기에 보면 밀물이 들어오는 초저녁에 공격을 시작하여 자정에 이를 때 까지 적을 쳐부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된 자세한 전투 상황을 보면 우리 수군이 밤 조수를 틈타 적선이 정박해 있는 작은 포구로 돌격해 들어가 적선 10여척을 분멸해 버렸다. 그동안 물때가 맞지 않아 왜적의 함선을 격파하지 못했는데 이날 전투에서 비로소 적선을 분멸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이다.

자정이 되자 조수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전선들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명나라 수군들에게도 퇴각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명 수군들은 신호를 무시하고 전투를 계속하다가 많은 전선들이 갯바닥에 걸리고 말았다. 난중일기 10월 3일자에 보면 “명나라 사선 19척과 호선 20척이 불타 진린 도독이 뛰고 절고 하는 것이 형언할 길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조명연합군이 10월 2일과 3일 두 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어찌 왜성을 격파하고 고니시를 잡지 못했던 것일까. 그 가장 큰 요인은 소극적인 육군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무리 수군 쪽에서 맹공을 한다 해도 최종 성을 격파하는 것은 육군의 몫이다. 그런데 유정 제독은 공격은커녕 오히려 고니시와 거래를 하고 있었으니 결과는 불문가지인 것이다.

두 번째 전투에 대해서도 이덕형이 올린 장계 내용을 보면 “초 3일 수군이 대포로 고니시의 방을 맞혔는데 왜군들이 황급히 동쪽으로 몰려, 이때 육군이 서쪽으로 밀고 들어갔으면 성을 함락 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육군의 김수 장군 등이 진격을 청했으나 유정은 오히려 화까지 내면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고 팔짱만 끼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포로 된 우리 백성들이 성위에 나와 성이 비었다고 외치기까지 했는데 유 제독은 끝내 공격을 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전말, 극복과정 그리고 전후교섭 등이 상술된 선묘중흥지에는 고니시가 유정제독에게 끊임없이 뇌물을 보내 유 제독이 고니시의 말을 들어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유정 제독은 군량까지 버려두고 순천 방향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수군 단독으로 왜성을 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하랴, 10월 9일 이순신 장군도 진도독과 함께 광양만을 떠나 고금도 본영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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