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식 관세사(광양관세사무소)

순식간에 일본함선 31척이 명량울돌목 해류의 블랙홀에 빨려들어 수장되었다. 격렬한 포화의 격전 끝에는 일본함선들이 사력을 다해 좁은 수로를 빠져 나가려고 뒤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에 조선수군은 한척이라도 더 격침시키려고 추격전을 벌렸다. 기적같은 대혈전끝의 승리였다. 조선수군, 어선위의 민초백성과 육지의 백성들은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는데, 그 감격적인 통곡이 해상에서 육지에서 명량해협을 뒤덮었다. 이 기적같은 해전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의 신화이다.
명량대첩에서 격침한 일본의 함선수는 31척이지만 조선수군은 한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으며, 그 함선에 승선한 조선수군의 인명피해도 미약했다. 이순신은 사전에 치밀한 전략으로 지형과 조류도 계산했던 듯 싶다. 조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뀔때까지 12척으로 버텼다는 사실자체가 기적이었다. 정말 하늘이 도왔다. 그때 해류가 바뀌지 않았으면 일본전선이 추가로 1백 여척 더 밀고들어 왔을 것이다.
13척의 배에 화살이나 탄약, 물등이 얼마나 더 있었을 것이며, 조선수군의 체력은 바닥이나 있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전쟁의 신이 조선의 바다와 국토와 백성들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었다. 명량대첩이 있은 후 이순신장군은 전략상 전라도 고군산도까지 후퇴하였다. 조선수군은 10배이상의 적을 맞아 좁은 해협인 울돌목과 조류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왜군의 서해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에 유리하도록 바꾸어 놓았다. 명량대첩후 진도섬 백성들은 일본수군들의 죽검도 진도섬 왜덕산에 묻어준것이 어느집 가문족보에 기록되어, 일본군 무덤의 위치를 찾았고,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 후손및 고향인 구루시마 시민과 중국 진린제독의 후손 그리고 이순신장군의 후손들도 진도 명량대첩 축제에 참가하고, 명량해전의 재연을 참관한다. 또한 구루시마 시에서 진도소재 고등학생 10여명을 구루시마 시로 초대하여 일본학생들과 함께 일본을 여행하는 TV를 보게 되었는데, 참으로 양국의 우애를 다지는 흐뭇한 사연이였다.
암초에 부딪친 물살 소리가 바다의 울음같다는 울돌목 명량해협을 가로지르는 진도대교 동남쪽 직선으로 5km떨어진 진도벽파진에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가 세워져있는데, 이는 명량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고 진도출신 순절자를 기리기위해 1956년 세운비석이 서있다. 또한 해남우수영에도 우수영성곽에 세워진 전라우수영 대첩비가 세워져있고 명량대첩 축제때는 강강술래도 시연되고 있다.
국난의 위기에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길이 열린다는 이순신장군의 애국충성과 불굴의 희생정신 및 솔선수범을 받들어 모든 국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유비무환의 국가안보를 튼튼히하는 길이 애국하는 길이요 민족이 번성하는 것임을 다짐해 본다.
 
끝으로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쫓아야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영화 “명량”에 나오는 이순신장군의 대사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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