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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도해전의 역사적 조명(1)명량해전 승리한 이순신에 은자 20냥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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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30  09: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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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정식 광양관세사무소 관세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 제14회 행정고시 합격 관세사시험 출제위원 / 관세직 5급 승진 시험위원 한국관세학회 부회장
1597년 9월 16일의 명량대첩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는데, 왜군은 수륙병진정책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서해로의 진출이 봉쇄당하게 되었다. 육지의 조선군에게도 다시 싸울 용기를 주었으며 의병들도 동시에 다시 일어나 싸우기 시작하였다. 명나라 군대들도 호남방어선인 남원성이 함락되고 명군이 대패한 후 호남지역이 일본군에 점령되자 왜군과의 전쟁이 조선구원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국토방어전의 성격으로 받아들이고 그 파병규모도 당초 계획한 8만 명에서 14만 3700명으로 대거 늘렸다.
 
그러던중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천행으로 승리하자 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 일본이 수군을 통해 산둥반도 등 중국연안을 침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군에 인색한 평가를 내리던 명나라 장군들도 이순신의 공적을 높이 칭찬했다. 명나라 경리 양호는 개인적으로 은자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 이 붉은 비단을 걸어 주는 예식을 올리고 싶으나 멀어서 할 수 없다” 하며 높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승전을 보고하는 장계를 받았을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거제현령 안위를 통진대부로 승진시키는 등 이순신 부하들을 승차시키는데 불과하였고, 이순신에게는 이미 벼슬이 높다는 이유로 아무런 포상을 하지 않았다. 경리 양호가 나서서 이순신을 포상하라고 독촉했지만 선조는 사소한 적을 잡은데 불과하다고 하며 2달 후에야 은자20냥을 하사하였다. 또한 12월5일에는 이순신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기를 하사한 일이 있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승리 후 험한 물살과 형세의 위태로움을 피해 울돌목을 빠져나와 신안군 당사도와 여의도를 거쳐 북상하였는데 여의도에서 피난선 300여척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고 영광의 법성포와 위도를 거쳐 고군산도인 선유도까지 북상하였다. 이는 식량과 식수를 공급받고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서이고, 일본수군의 반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은 12일간 선유도에 머물렀는데, 그 기간동안 심한 몸살로 건강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이는 투옥과 고문, 모친의 죽음, 목숨과 조국의 운명을 건 전투 등으로 심히 쇠약해지고 아팠다. 선유도 있던 10월 1일에 이순신에게 아산본가의 처참한 소식이 전해졌다. 아산의 고향집이 왜적에게 분탕질 당하고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맏아들 회를 서해를 통해 올려 보냈다. 
 
일본수군은 명량해전 후에 전열을 재정비한 후 이순신 함대를 잡기위해 1천여 척을 이끌고 이순신 뒤를 쫓아 혈안이 되어 계속 북상하며 영광의 칠산 앞바다까지 도달하였다. 일본수군은 이 칠산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피난하던 강항을 체포하였는데, 강항이 한문에 밝고 지체있는 양반신분임을 파악하고 심문하는 중에 강항으로부터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 1만 여척과 함께 태안 안행량에서 가로막고 있으며, 이 곳은 해마다 배가 표류하고 난파하는 등 매우 험란한 수로라는 것과 유선이 이미 군산포까지 와있다는 강항의 거짓말을 듣고 그냥 남해안쪽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사실 이때 명나라 수군은 파병한다는 소문만 무성하였지, 실제로 조선에 입국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순신도 육지에서 왜군의 살육과 횡포가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3일 고군산도를 출발하여 부안 변산, 영광 법성포, 여의도를 거쳐 9일에는 해남의 전라우수영에 도착했다. 우수영은 23일 동안에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인가와 사람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은 신안의 팔금도에 18일간 정박하게 되었는데, 10월 14일 저녁 무렵 겉면에 둘째아들 필체로 쓴 “통곡” 이라는 두 글자가 쓰인 편지를 받았다. 이순신은 직감으로 막내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순신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발했구나 슬프고 슬프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하루밤 지나기가 1년 같구나” 하며 몹시 애통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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