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합군 군사들이 일제히 적의 소굴로 추격하여 진격해 들어가 공격하였다.
좌협 이방춘이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적의 길을 차단하니 적은 먼저 두장수를 보호하여 성안으로 들어가고, 미처 성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길에서 육박전을 벌였고, 왜교성 외곽 입구에 있던 왜군들이 조총으로 공격했다. 이에 명나라는 왜군 수급 98급을 베었고 명의 피해도 많았으며,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명나라 중상자, 전사자를 베어온 수급이 270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조명연합군은 적의 성채를 완전 포위하였고, 왜군은 조명연합군의 기세에 눌려 공격하지 못하고 수성만 하는 공성전에 들어갔다.
한편, 유정은 검단산성에서 공성전을 위한 운제거, 비루, 포차등 공성무기들을 준비했다.
고금도 수군통제영에 머물던 이순신은 1598년 9월 15일 모든 적들이 곧 철수해 돌아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고금도를 진린도독과 함께 출발하여 순천 왜교성을 향해 출항했다.
9월 18일 오후 2시에 고흥 나로도를 거쳐 방답(여수시 돌산면)을 지나고 9월 19일 아침에 항로상 여수의 좌수영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적의 수중에 들어간 전라좌수영은 참담한 모습이었다.
9월 20일 오전 8시에 긴 항해 끝에 이순신과 진린 연합함대는 왜교성 앞바다에 진을 치지 않고 남해 하개도로 동진해갔다.
9월 21일 오전 8시경 이순신은 왜군의 복병이 잠복해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탐망선과 척후선을 교대로 보내 더욱 철저하게 정찰하였다.
탐망군관이 돌아와 “통제사 나리! 묘도에서 송도까지는 왜적이 없으나 장도에는 군량창고를 지키는 왜군이 늘 있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즉시 알리고 하개도에서 묘도 쪽으로 출진하였다.
조명연합함대도 같은 날 진린의 함대는 왜교성 쪽에서 볼 때 후방인 묘도에, 이순신함대는 전방인 송도에 결진하였다. 진린은 무공에 집착하는 것 말고는 이순신의 의견에 잘 따라주었다.
이순신은 왜교성에서 2.5Km 앞바다에 있는 왜군의 해상 경계 초소이자 보급기지인 장도(노루섬)에 올라가 섬의 동쪽을 화포로 공격하였다.
장도는 왜장 고니시 부대의 전방 해상군수기지였다. 수로군은 번개같은 작전으로 장도에 주둔한 왜군 경계병을 사살하는 등 첫 전과를 올렸다. 군량미 3백석과 우마를 탈취하고 포로가 된 우리 백성 30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보고하고 장도에서 가까운 삼일포를 습격했다. 왜교성을 공격하려면 후방에 적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삼일포를 소탕하였으니까 이제 마음 놓고 왜성을 공격해도 좋게 되었다.
 
(다음 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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