荊渚騎牛-梁震(형저기우-량진)[6]

                                      매천 황현
망국엔 사대부들 나라 망친 사단들이
조정에 춤추는 이 절반은 최노였네
느긋한 봄강 보면서 감귤 가득 심었지.
亡國先亡士大夫   梁庭舞蹈半崔盧
망국선망사대부   량정무도반최로
荊南進士頭如雪   倦對春江種木奴
형남진사두여설   권대춘강종목노

나라 망친 사대부들 이들 반이 최노였네, 
형남진사 머리 희고 봄강 보며 감귤 심네
 
본 시제는 병오고(丙午稿: 병오년 원고-1906年) 제병화십절(題屛畫十絶: 병풍 그림에 제하다) 여섯 번째다. ‘양진(梁震)’은 오대 때 형남의 재사였다. 당나라 말기에 진사에 급제하고, 후량이 당나라를 대신한 뒤에는 주전충을 위해 힘을 쏟기를 원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형남의 실권자 고계흥의 강압에 의해 할 수 없이 그를 도왔으나, 주는 관직은 받지 않고 늘 자신을 ‘전(前) 진사’라고 칭했다. 시인 망국에는 먼저 사대부를 망치는 법이니, 양나라 조정에 춤추는 이들 반이 최노였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느긋하게 봄 강을 바라보며 감귤을 심었네(荊渚騎牛-梁震6)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망국에는 먼저 사대부를 망치는 법이니 / 양나라 조정에 춤추는 이들 반이 최노였네 // 형남의 진사는 머리가 눈처럼 희어졌고 / 느긋하게 봄 강을 바라보며 감귤을 심었네]라는 시상이다. 이어진 오른쪽 평설에서 시상의 범상함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나라 망친 사대부들 이들 반이 최노였네, 형남진사 머리 희고 봄강 보며 감귤 심네’라는 화자의 상상력이다.
위 시제는 [형남의 물가에서 소를 타다6-양진]으로 의역해 본다. 양진에 대한 서지적 고찰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양진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관서공자라는 미명이 있었으며 형주자사, 탁군태수, 태위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가 태위로 있을 때 안제의 유모인 왕성 및 중상시 번풍 등의 세력이 강하여 조정의 부패가 만연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언했다. 번풍의 모함으로 파면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이어진 시어 ‘최노(崔盧)’는 위진 시대부터 당대까지 오랜 기간 동안 조정의 고관을 독점하였던 산동의 최씨(崔氏)와 노씨(盧氏) 집안으로 인식되어 왔다고 한다.
시인은 시적 대상자로 선정한 양진이란 사람은 문헌에 많이 알려진 큰 인물이면서도 바르게 살았던 사람이다. 시절이 어려운 때 망국에는 먼저 사대부를 망치는 법이니, 양나라 조정에 춤추는 이들 중에서 반절쯤 최씨와 노씨였다는 선경의 시상을 일구어 냈다. 사대부들의 중요성을 강조해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날치는 자들을 꼬집고 있다.
화자는 조선말에 민씨 일파가 조정을 좌지우지 하는 형국과 같았음을 생각하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나라가 어지러운 때 형남의 진사들은 머리가 눈처럼 그렇게 희어졌고, 느긋하게 봄 강을 바라보며 감귤을 심었다는 정반합(正反合)을 생각하게 한다.
 
【한자와 어구】
亡國: 망국. 先亡: 먼저 망하다. 士大夫: 사대부. 梁庭: 양나라 조정. 舞蹈: 춤추다. 半崔盧: 반은 최노다. // 荊南進士: 형남의 진사. 頭如雪: 머리가 눈처럼 희다. 倦對春江: 느긋하게 봄철의 강을 바라보다. 種木奴: 감귤 나무를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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