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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시위 주도로 옥고 치른 후 독립운동자금 지원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 독립운동가 김상후 선생의 삶
황망기 기자  |  mki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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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07  11: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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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 3.1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상후 선생
   
▲ 국립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김상후 선생의 묘
 광양시는 지난 1일 문화예술회관에서 ‘제100주년 3·1절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독립유공자 유족 및 후손과 기관단체장, 학생,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된 3.1만세운동은 100년 전 광양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1919년 광양의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 중 금호 김상후 선생(1870 ~ 1944)이 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김상후 선생이 태어난지 1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광양시는 1919년 4월 1일 광양읍 장날에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4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 재 현행사를 가질 계획인데, 100년 전 4월 1일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가 김상후 선생이다.
김상후 선생은 1870년 생으로 어린 시절에는 광양의 흥학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강직해 오직 학문에만 심취했다고 한다.
   
▲ 1956년 열린 3.1절 기념행사 참석자들이 독립선언서 낭독 후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사진 중앙이 김상후 선생의 장남인 김동주씨다.
20세 되던 해인 1890년, 순능참봉을 맡으며 출사한 후 통정대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호군 오위장 등을 역임했으며, 서울 필동에 학숙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선생은 1900년, 고종의 명으로 전라북도 무주에 소재한 적상산 사고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에는 애국계몽운동과 육영사업에 전념했다.
그러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낙향 후 평소 교류하며 친분이 두터웠던 성재 김태석, 창강 김택영, 홍암 나철, 위창 오세창, 우당 이회영, 매천 황현, 소운 황병욱 선생 등과 학문과 시국을 논의했고, 종래에는 독립운동에도 뜻을 같이 했다. 
1919년, 국권회복운동이 각지에서 격렬해지자 선생은 “나의 소견과 합당하다”며 만세시위를 주도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3.1만세운동과 관련, 일제의 재판기록이 남아있는 광양사람들 중 선생은 가장 연장자이다.
선생은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서울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유생들 중 순천의 박항래, 구례의 박경현, 낙안의 유흥주 선생 등과 회동하고, 옥룡의 동지와 광양읍의 동지를 규합해 3월 23일 독립만세시위 의거를 계획했다. 
그러나, 3월 27일 옥룡출신인 정성련 선생이 1차 시위의거를 주도하고 체포되자 3월 29일 김석용 선생 등 광양읍의 동지들과 더불어 4월 1일 2차 독립만세시위의거를 준비했다. 
광양에서의 1차 시위 후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으나 4월 1일 오후 3시, 광양읍 우산공원에서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초한가, 장부가, 적벽가를 개사하여 불러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자 오후 3시경 동지들과 사전에 제작한 태극기를 군중들의 손에 나누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광양시장으로 행진했다. 
이날 만세시위를 주도한 서경식, 박용래, 정귀인 선생은 현장에서 일제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선생은 이날 오후 5시 쯤 만세시위 주도자를 체포하려고 검문을 벌이던 일제 헌병에게 “헌병이 무고한 인민의 신체를 검사하는 것은 불법이다”고 항변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귀가하던 도중 광양읍의 음식점에서 30여명의 군중들을 향해 “조선과 일본은 전연 다른 민족으로 동일시 될 수 없다. 조선은 개국 이래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만큼 오늘날 민족자결로써 조선독립을 주장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라며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4월 1일 시위 이후 광양읍에 은거하며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던 선생은 일제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에도 선생은 황병욱 선생과 더불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군 군자금을 계속 지원했으며, 담양의 고재준 선생과 연락하며 삼인산 금광개발 및 광주학생운동 비밀결사 조직을 지원했다. 그러나, 1934년 11월 2일 고재준을 비롯한 30여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을 제외한 2명의 아들은 보국대로라는 이름으로 징병되어 만주로 끌려갔으며, 나머지 2명의 아들은 일본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다. 가산은 몰수 되어 가족의 삶은 피폐했으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감시는 삼엄하여 운신(運身)의 자유도 없었다. 몰수된 가산 중 전남 광양시 옥룡면 용곡리 산 180번지에는 일제가 신사를 지어 광복 후에야 헐어내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평생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선생은 꿈에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1년여 앞둔 1944년 “기회를 보아 일을 도모하되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이치대로 돌아가니 매사에 서두르지 말고 의연히 대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고손자 김형택씨는 “고조부님의 삶이 재조명 되어 상훈의 훈격이 격상 되고, 독립만세의거 현창비 및 사당건립, 생가복원 등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져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황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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