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준  성신여대윤리교육과명예교수의 주제발표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편집자 주)           
                         
머리말
오늘날 의병 운동과 의병 정신은 화석화되어 박물관의 낡은 골동품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필자는 박물관의 골동품 취급을 당하는 의병을 시장에 내 놓고 그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의병 정신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 공동체에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황병학 의병장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의병의 이념과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는데 있어 황병학 의병투쟁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하였다. 이 글은 황병학 의병운동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오늘의 한국사회에 어떻게 되새김할 것이냐에 목적을 두고 있다.
 
항일 의병투쟁의 개관과 황병학 의병의 위치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투쟁은 일반적으로 네 단계로 나누어진다. 즉, 초기 단계, 재기 단계, 고조 단계, 퇴조·전환단계이다.
초기 단계의 의병운동은 민비를 살해한 을미사변과 친일 내각이 강행한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운동’이다. 을미 의병은 친일 관리들과 조선 군경을 대상으로 투쟁하였고,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된 후 대부분 해산되었다.
재기 단계의 의병운동은 1904년 러일 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을사의병운동’을 말한다. 을사의병은 을사조약 반대와 친일 내각 타도를 목표로 하여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고조단계의 의병운동은 고종의 강제 퇴위,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뒤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맺은 정미 7조약,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정미의병운동’이다. 군대 해산 당일 시위대 소속 군인 1600여 명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그 저항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해산 군인의 합류로 의병 부대는 우수한 지휘관과 새로운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의병부대의 연합작전이 활발하게 되어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13도 의병이 서울  진공작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때 평민 의병장의 수가 양반 의병장의 수를 능가했고 일제의 군경이 직접적인 교전의 상대로 의병운동은 ‘국권방위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퇴조·전환 단계의 의병운동은 일본군의 소위 ‘남한대토벌’과 일본의 한국 병합을 계기로 의병세력이 퇴조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간 ‘합방’전후의 의병을 말한다. 1909년 9월과 10월, 일본군의 남한지역에 대한 잔인한 진압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의병은 대거 만주지역으로 옮겨 갔으며, 잔여 세력은 산악지대에 분산되어 투쟁을 계속했다. 만주 지역에 옮겨 간 의병 세력은 애국계몽세력과 제휴하여 근대적 독립군 부대로 재편성되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황병학 의병운동은 전환·쇠퇴기의 의병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 만큼 황병학 의병은 어느 의병보다 많은 고통과 곡절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격문을 붙이고 산포수 등 250여명의 장정들이 호응하여 1908년 7월26일(음) 광양의 백운산에 ‘호남창의대장기’를 꽂고 의병투쟁을 선고하였다. 광양군 진하면 망덕포의 일본 어업자본가들을 공격한 제 1차 전투에서 묘도해상전의 4차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바로 형극의 길이었다.
1909년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겨우 산발적이며 소규모적인 저항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역에서는 날이 갈수록 의병의 기세가 왕성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군중과 의병이 일체가 되어 서로 변신하면서 전 지역을 뒤덮게 되었다. 또한 의병부대의 행동방식은 백주에 공공연하게 지방의 중심지에 들어가 정찰하고, 적의 허점이 있으면 기습하는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이다.이러한 행동방식은 의병과 군중이 일체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전술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황병학 의병군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9월1일부터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호남지역에 대한 의병 탄압작전을 본격화한 것이다. 이 토벌 작전의 목적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경제 참락의 루트를 확보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가장 많은 수출품이 쌀이었고, 한국에 대한 민간자본이 가장 매력적인 투자 대상도 곡창지대의 토지였다. 그런데 의병의 투쟁에 의해 일본 세력이 뿌리내릴 수 없고 또한 해상 의병들의 활동에 의하여 쌀을 반출할 수 없게 되는 위험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명예회복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남도는 이 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근거지였으며, 육상에서의 의병 투쟁에 의하여 일본 육군도 이 지역에는 침입을 못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일본군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역사상의 치욕을 명예회복을 하자는 것이다. 
‘남한대토벌’의 결과 한국합방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전라남도의 의병활동은 1909년 말까지 사실상 마무리되고 일제의 경제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은 매우 치밀하고 잔혹했고 교활했다. 황병학 의병부대의 선봉장인 황순모 의병의 애달픈 비극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일본군이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과 마을을 태우고 귀순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황순모 선봉장은 하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순모 선봉장은 일본에 협조하고 다른 의병의 소재를 밝히라고 회유하고 고문했으나 끝까지 거부하고 총살을 택한다. 이 총살 현장에서 같은 의병 활동을 한 한규순이 “의사라면 그만이지 장졸의 구분이 어디 있으려. 나도 같이 죽여라”하면서 황순모 선봉장을 끌어안으면서 일본군의 총탄에 목숨을 함께 했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동시에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황병학 의병운동은 남한대토벌작전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치열하게 전개했다. 황병학 의병장은 해산을 거부하는 의병들을 이끌고 여수의 묘도로 잠적하여 재기를 도모했으나 일본 군경에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의병이 희생되었고 해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나 황병학은 불사조처럼 체포되지 않고 피신하다가 3.1일 운동을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에 나선다. 고흥에 은거중인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 국민대회 특파위원’의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러 다녔다. 기산도와 함께 임시 정부에 가려고 했으나 기산도는 체포되고 황병학 의사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황병학 의사는 1923년 봄 임시정부의 특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하려다 신의주에서 체포당하고 만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4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고향인 비촌으로 돌아왔다. 모진 취조와 고문으로 쇠약해진 그는 193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황병학 의병장의 생애와 그 발자취는 한국 의병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위대한 서사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병 운동의 이념적 특징 
 
의병 투쟁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병 운동의 이념적 특징이 무엇인지 도출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부정의에 대한 저항, 민족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 정립, 세 가지 측면에서 이념적 특징을 찾아보고자 한다.  
 
1. 부정의에 대한 저항 - 의병 정신의 제일 큰 이념적 특징은 ‘부정의에 대한 저항’으로 본다. 의병 운동의 정의관은 ‘배분적 정의’니 ‘절차적 정의’니 하는 서양의 정의관이 아니라 옮고 바른 사유와 행동의 총체로서의 정의관이다.  
이러한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부정의이다. 의병정신의 핵심은 이러한 부정의에 대한 저항에 있다. 확실한 것은 의병운동에 나타난 부정의에 대한 저항이 세계 사회 운동사에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치열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의병 운동은 ‘ 실패가 예고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실패가 예고된 저항을 계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롭다 하겠다. 그래서 의병정신은 독립 운동의  초석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자주와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바로 의병의 부정의에 대한 불굴의 저항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2. 민족 정체성, 문화 정체성의 정립 - 위정척사사상이나 의병 운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 민족 정체성의 훼손과 문화 정체성의 붕괴에 대한 위기감이다. 우리의 의병 운동은 일본인의 한국 인식과 논리에 대한 첫 무력 저항운동이다. 우리의 얼과 혼을 빼앗는 일제의 침략에 처절하게 저항한 것이다. 이러한 의병정신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채호는 일본제국을 ‘강도 국가’라고 보고 민중혁명에 의한 전면적 투쟁을 주장한 것은 의병 정신의 계승이다.      
3. 엘리트 계층의 책무 정신 - 의병 운동은 도학의 전통에  바탕을 둔 사림의 정신을 국난의 상황에서 구체적 저항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라 본다. 여기서 필자는 사림의 문화에서 지도층, 엘리트 계층의 엄중한 책무 정신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선비 정신의 구현이다. 의병 정신의 핵심중의 하나는 바로 지도층, 엘리트 계층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큰 길잡이가 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변화와  의병 정신의 재창조
오늘의 한국사회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는 용어로 ‘시민사회’와 ‘세계화’라는 단어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시민 사회에 대한 관심은 민주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시민사회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자율적인 사회로서, 협의와 협동을 중시하고 다수와 소수를 다 같이 존중하면서 공공의 복지를 지향하는 사회이다. 이와 함께 바람직한 시민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 윤리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세계화는 다문화란 용어와 함께  오늘날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 세계화 시대에 있어 의병 정신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재창조되어야 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1. 정의로운 공동체 구현과 엘리트의 자세 - 필자는 의병 정신의 첫 번째 특징으로 ‘부정의에 대한 저항’을 들었다. 이러한 부정의에 대한 저항 정신은 이제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 정신적 길잡이로서 의병 정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데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 지도층과 엘리트 계층의 도덕심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많은 노블리스들은 국민들에게 ‘죄송’한 대상이 되고 있다. 오죽했으면 우리의 사회 지도층은 사회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지도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애기도 나오고 있다. 의병 정신에 나타난  보국 정신과 자기희생 정신은 한국 사회에 노블리주 오블리주 정신을 구현하는데 큰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이다. 이제 그 등대의 빛이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 견인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의병정신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2. 공생적 민족 정체성과 문화정체성의 정립 - 의병 정신에 일관되어 나타난 특징이 민족 정체성, 문화정체성에 대한 지향이다. 정체성 개념은 ‘변화 속의 영속성’과 ‘다양성 속의 단일성’이라는 두 요소를 지니고 있다. 정체성의 출발점은 자아 중심성에 있다. 이 자아 중심성의 강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아 중심성은 타자와의 만남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한말 의병 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정체성 정립 운동이다. 
 
3.  시민민족주의와  평화주의의 구현  - 의병 운동이 한국 근대민족주의의 형성에 있어 제일 큰 뿌리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세계화, 다문화 시대에서 의병 정신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있다. 의병 운동에 나타난 민족주의적 가치가 세계화, 다문화 시대에서 나가야 할 방향은 시민적 민족주의의 초석이 되는 길이다. 
 
맺음말
의병 정신은 한국 사회를 정의로운 공동체로 구현하는데 밑거름이 되는 정신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의병운동은 시민운동의 좌표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의병은 국가가 못한 일, 하지 못할 일을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하는 일종의 공동체 운동이다.   
필자는 의병정신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마당으로 시민운동을 거론하고 싶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다양한 시민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시민운동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민주사회에서 시민운동의 당위성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토대가 없는 위로부터의 시민운동, 집단이기주의의 변형, 선정주의적 운동, 정부의 보조금에 의지하는 의타성, 시민운동의 폐쇄성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민주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은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시민운동이 정의롭지 못할 때 그 사회는 병들고 혼란스러워 진다.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의병정신을 갖춘 시민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시민운동과 의병운동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의병운동에 나타난 정신이 우리 한국 사회를 ‘바르고 행복한 사회’로 만드는  정신적 토대와 자양분으로 큰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방영준 (성신여대 교수)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