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촌마을은 광양향교를 품고 있는 마을로 예나지금이나 광양교육의 중심지다. 마을 골목에는 광양향교 저태길이 벽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은 광양교육지원청, 매천황현 추모비, 광양향교, 골목길 벽화 등 이다.

마을 이름을 보면 그 마을의 유래를 단번에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교촌마을이 그렇다. 교촌마을은 학교(校)와 마을(村)을 뜻하는 마을지명으로 보아 향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불리어졌다. 또 향교가 설립된 시기와 맞물려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광양읍 우산리에 광양향교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마을이 교촌마을이다.

■광양교육의 중심
광양향교는 조선 태조 때인 1397년 각 도 안찰사에서 주·부·목·현에 향교 1교씩을 창건토록 하였다는 기록과 대성전 중수기에 의하면 이 당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방에 설립한 국가교육기관이다. 공자 등 성현(聖賢)의 위패를 모시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배움의 공간인 명륜당이 중심건물이다.
광양 향교는 창설 후 정유재란(1598년)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인 1613년 당시 광양현감(이오)이 부임하자마자 지역의 유림들과 협력하여 대성전(大成殿)을 중건하고 연차적으로 여타 건물을 재건하였다. 6.25전쟁 때 또 다시 폐허가 되었다가 1966년 출입문인 풍화루를 시작으로 다시 짓기 시작해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등 건물 9동이 있다.
향교 건물을 경사진 터에 세울 때는 일반적으로 전면에 강학 공간, 뒤편에 배향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갖추지만 광양향교는 여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편이다. 광양향교는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2001년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광양향교 입구에는 근래에 세운 공적비 2기와 불망비 4기, 흥학비 1기 등 총 7기의 비가 있다. 이들 중 불망비 4기는 1900년대 초기에 세운 것들이며, 흥학비 1기는 건립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또 한말의 문장가이자 시인인 매천 황현 선생의 추모비, 의사 황병학 기념비, 5의사(서경식, 정용현, 정길화, 김상후 박용래) 3.1운동 기념비가 유림회관 앞에 마련돼 있다.
무엇보다 현재 이 마을 입구에는 광양교육지원청이 위치하고 있다. 옛 학교인 향교와 현재 광양 교육의 중심인 교육지원청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 마을이 앞으로도 광양 교육을 위한 마을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겠다.

■광양향교 저태길
광양향교를 들어가는 골목길에는 ‘향교저태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저태길’은 전라도 사투리로 ‘우리 곁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마을의 향교저태길은 ‘광양향교가 곁에 있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광양향교 저태길은 광양만신문이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조성한 것으로 예쁜 벽화로 꾸며져 있다. 저태길은 향교길에서 향교주차장을 거쳐 우산공원, 봉양사까지 약 1.4km 구간을 말한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마을 회관 가기 전에 예전 마을사람들이 공동식수로 활용하던 우물과 빨래터가 보인다. 이 빨래터도 벽화를 이용해 마을의 아낙내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장소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교촌마을에는 상여를 멜 때 부르는 오채소리가 전해져 오며 ‘덕석기’를 앞세운 마을의 농악이 매우 특이한데. 이 마을의 벽화는 이 농학을 알리는 데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광양농학은 2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북 놀이가 다른 고장에 비해 더 있고 다른 하나는 김매기를 할 때의 농악인데 김매기가 끝나면 수 십 명의 농군이 농악대로 변하여 부락 간에 농악접전을 하였다고 한다. 저태길 벽화에는 이 용기를 들고 있는 농악꾼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용이 그려진 덕석기를 귀하게 여기고 영적인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마을 어귀에 신처럼 세워놓는 풍습도 가졌다고 전한다. 
광양향교를 가기 전 광양저태길을 둘러보고 교촌마을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듯하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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