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촌마을은 형제의병장의 충의가 깃든 마을이다. 사진은 충의사, 신촌마을 표지석, 의병장마을센터, 홍살문, 공덕비 등이다.

광양 서천 줄기를 따라 성불계곡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형제의병장마을’이라는 이정표를 한 신촌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백운산 동남쪽에 위치한 바구산 주령을 타고 내리뻗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아름다운 산세와 더불어 맑은 물로 수려한 자연미를 자랑한다.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신촌교와 그 아래 흐르는 계곡 물이 그 아름다움에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 약초와 띠풀의 마을
신촌마을은 1480년경 전(全)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백운산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예로부터 약초와 띠풀이 많다하여 ‘띠밭골’로 불리어왔다. 처음에는 약초와 띠풀 의미를 갖는 신기촌(莘基村)이라 했다가 그 후 띠풀 ‘기(基)’자를 생략하면서 ‘신촌’이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옛날 문헌에 기록된 ‘안치리’라는 마을이 신촌마을 서북쪽에 있었는데 ‘질마재’라고도 불렀다. 신촌에서 순천시 서면 청소리로 가는 고개 밑에 위치했는데 1900년대 초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질마는 짐을 실어 나르는 소의 등에 얹은 안장을 말하는데 질마재는 이 마을의 산고개 이름으로 부르며 짐을 실어 나르는 소의 등처럼 생긴 고개형국을 뜻했다. 안치리(질마재)마을에는 12농가가 한때 이곳에 있다가 1967년경 신촌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신촌마을은 백운산 성불계곡과 질마재 골짜기가 있어 농촌체험휴양마을로 각광을 받는다. 체험프로그램으로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밤 줍기, 고구마 캐기, 단감 따기, 매실 따기 등을 비롯한 전통 염색 체험, 가축 기르기 체험 등이 있다.  신촌 마을은 도시지역과 농촌지역 간 정보격차 해소와 주민 소득증대를 위해 행정자치부에서 조성하는 2007년도 정보화마을에 선정됐으며 2013년 전남 정보화마을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올해 1월 지정이 해제됐다.

■ 쌍의사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쌍의사와 강희보·강희열 형제 의병장 묘역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곳곳에 보인다. 
강희보·강희열 형제는 이 마을에서 강천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들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인근 마을장사 100여명을 모았고 군사를 이끌고 앞서 단성(丹城, 경상도 산청군에 속함)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백부인 강인상을 구하기 위하여 달려가 함께 싸웠다. 이후 1593년 6월에 진주성에 10만이 넘는 왜군이 밀어 닥치자 강희보·강희열 형제는 휘하장수를 이끌 창의사 김천일의 휘하에 들어가 싸우다 1593년 6월 27일 형인 강희보가 전사하고 29일 강희열이 뒤이어 전사하게 된다.
원래 강희열은 풍자가 수려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는데 무과에 합격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강희보 보다 앞서 모집한 장사를 이끌고 단성서 백부인 강인상과 더불어 왜군을 저지하였다. 흔히들 희보·희열 형제는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그 행동을 늘 함께 했던 것으로 이야기 되었으나 희보는 순수한 백의창의였던데 비하여 희열은 이미 무과에 합격해 일정한 군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신분이었다.
훗날 조정에서는 이들 형제를 진주 창열사(彰㤠祠)에 배향하였고, 영조 40년에는 희보에게 호조과랑(정6품)이 희열에게 병조참의(정3품)가 추증되었다. 1970년 진주강씨 문중과 광양의 유림 및 유지들이 ‘의병장 강희보 강희열 형제장군 승모회’를 발기 창립하여 다음해에 묘소를 보수했다. 1974년에는 광양군비와 독지가의 찬조로 묘비가 건립되었으며 그 이후 2번에 걸쳐 묘역정화사업이 이루어져오다 1998~2003년에 걸쳐 묘역아래에 형제 의병장을 배향하는 사당을 건립했다. 그 사당이 바로 쌍의사다. 쌍의사는 2007년 7월 4일 광양시의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됐으며, 쌍의사에서는 매년 10월 광양향교 유림회와 승모회에서 진주강씨 광양문중과 함께 시제를 모시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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