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적마을은 한때 원월리에의 으뜸이 되는 마을로 통했다. 사진은 마을전경과 정자나무, 마을회관, 지석묘 등이다.

원적마을은 광양읍에서 옥곡면으로 가는 국도변에 자리한 마을로 남해고속도로와 관련이 깊다. 
이 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남해고속도로 아래의 터널을 지나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마을은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조사된 지역으로 알려지는데 남해고속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이 지석묘들이 발견돼 이 마을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지역임을 알리고 있다.

■으뜸이 되는 마을
원적마을은 문헌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1600년경부터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앞 지석묘와 출토유물로 보아 청동기시대(기원전 10세기~기원전 300년경)부터 이 마을권역에서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원적마을은 현재 옥곡면 원월리에 속해 있는데 원월리(元月里)의 이름 유래는 왜정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당시 청룡리(靑龍里), 월곡리(月谷里), 상원리(上元里), 하원리(下元里), 신기리(新基里) 일부 지역을 병합해 원적(元迪)과 월곡(月谷)의 첫 이름을 딴 원월리(元月里)가 된 것이다.
원적(元迪)마을은 이 원월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옥곡원(玉谷院)을 지키던 원지기가 살았다 하여 원지기 마을이라 불리었는데 이를 한문식으로 바꾸면서 ‘원지기’발음과 비슷한 원적(元迪)이라 했다.
원(院)이란 옛날 조정에서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하여 공무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었는데, 30여 년 전만해도 원(院) 모퉁이라는 곳에 옥곡원(玉谷院)의 터가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원적마을은 위치상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원(上元),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하원(下元)으로 나누기도 하며 지금은 통칭하여 원적이라 한다.
 
■원월리 지석묘
원적 마을의 지석묘는 남해고속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발견됐으며 1990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후 현재 마을 입구(하원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가운데 하나로 고인돌 또는 돌멘(支石墓, dolmen)이라고 하는데, 당시 이곳의 지석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석검, 유구석부, 석촉, 숯돌 등 석기류와 토기류가 있었다. 
특히 석검 2점, 숫돌 17점이 출토되면서 지석묘의 주인공이 석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한 장인이 됐는데, 이는 당시에도 석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한 장인이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현재 이 마을에 있는 지석묘는 총 6기이며, 이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지석묘는 길이 310cm, 두께 180cm의 거대한 괴석형이고, 2~3m의 간격을 두고 자리하고 있다.
지석묘 바로 앞에는 ‘원월리 지석묘’라는 표지석이 마련돼 있으면서 지석묘의 발굴 당시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한편 원적마을은 정자나무와 당산나무가 각각 있는데, 정자나무는 고속도로변 아래에 위치한 느티나무로 수령이 300년 이상됐다.
당산나무는 상원마을에 위치한 300년 된 팽나무다. 
지석묘 바로 앞에는 주민들이 쉴 수 있는 우산각이 있는데 정자나무 아래의 마을 쉼터와 함께 마을주민들은 여름이면 이곳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소통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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