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마을은 호남정맥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망덕산과 천왕산의 보호를 받고 있다. 사진은 마을전경, 망덕산, 당산나무, 마을회관, 망덕저수지 등이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 진월 IC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망덕산이 나온다. 장재마을은 이 망덕산을 앞에 두고 뒤로는 천왕산과 맞닿아 있다. 호남정맥을 잇는 두 산이 이 마을을 보호하는 모습이다. 또 마을 앞에는 논이 펼쳐져 있으면서도 섬진강의 물길이 바다와 접하는 망덕포구와 가까워 농·어업 모두를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가졌다.
 
■길게 뻗은 호남정맥과 옥녀봉
장재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진하면 장지촌(莊峙村)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1872년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진하면 장치리(莊峙里)라 하였다.
천황산 남쪽에 위치한 장재마을은 약 430년 전에 강씨가 처음 입촌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한다. 마을이름이 장재가 된 것은 진상면과 진월면의 경계지점인 배암재에서부터 시작된 산등성이가 진목·항목·구룡을 거쳐 장재마을 뒤까지 길고 곧게 이어지면서 불리게 됐다. 처음에는 장치(莊峙)라 했다가 후에 장재(長在)라 개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뒤쪽에는 망덕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를 통해 가뭄에도 물을 댈 수 있어 농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 저수지 바로 인근에는 마을 당산 나무가 있어 여름철이면 마을 주민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당산나무는 수령이 약 420년이며 해마다 음력 정월 8일이 되면 이곳에서는 당산제(當山祭)를 지낸다.
장재마을 남쪽에 있는 산 봉오리를 옥녀봉이라 하는데, 이 옥녀봉은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은 지명으로 옥녀(玉女)형국으로 멀리 건너편 옥곡의 구슬옥(玉)과 진상의 금촌마을의 비단금(錦) 지명과 관련이 있다.
옥곡면과 진상면 경계에 세 개의 산등성이가 남쪽으로 내리뻗어 삼발등 형국을 하고 있으며, 장재마을 옥녀봉의 옥녀가 진상면 내금마을 지역에 비단을 펼쳐놓았다 하여 그 지역을 금련촌(錦蓮忖)이라 했다고 전한다.

■왜군과 맞서 싸운 채구연
장재마을에는 왜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채구연의 묘소가 있다. 채구연 의사의 묘는 밀양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그의 묘 바로 아래에 조성된 작은 무덤들은 부하들의 묘라고 전해진다.
채구연(蔡九淵, 1528~1592)은 조선 중종 23년인 1528년 2월 14일 광양현 진하면 장치리(장재마을)에서 출생해 본관은 인천, 자(字)는 자정(自靖), 호(號)는 청허(聽虛)이며, 판서 좌상(佐祥)의 아들이다. 
1564년 해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1591년부터 1592년까지 밀양부사를 지냈다. 당시 그의 나이 64세 임에도 불구하고 부임 즉시 성지를 수리하고 병졸을 훈련시켜 공수를 굳게 하였다. 
1592년 4월 과로로 밀양부사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박진(朴晋)이 임명되었는데 밀양백성들이 난국을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인 채구연을 다시 유임시켜 줄 것을 경상감사에게 진정했고, 하회를 기다리던 중 동년 4월 15일 부산 ·동래· 울산이 왜구에 점령당하자 밀양부사 박진과 함께 전투에 임해 싸우다 밀양성에서 순절했다.
당시 공의·충의를 가상히 여겨 선조의 명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석구를 갖추고 제전(祭田)을 수여하고 수호인을 두어 묘역을 보호토록 했다. 
함께 싸우다 전사한 군관과 막하동지 6명을 공의 묘지에 속장(모두 10기)토록 했는데, 현재는 5구만 남아 있고 당시 석비(石碑)를 세웠으나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비문을 읽어보고 깨트려 버렸다고 전한다. 1975년 국비를 들여 묘역정화 사업을 통해 묘는 새로 단장됐다.

양재생 기자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