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웅동마을은 곰의형국의 마을로 광양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웅동교회가 있다. 사진은 웅동교회, 마을회관, 광양기독교100주년선교기념탑 및 기념관, 곰 조형물 등이다.

웅동마을은 진상면 황죽리에 속한 마을로 백운산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해 있다. 수어천을 따라 어치계곡으로 오르다 백학동체험마을에 이르면 좌측으로 들어서는 황죽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한참을 올라가야만 웅동마을이 나온다. 그렇지만, 웅동마을 입구에는 주변 산세와 다르게 광양기독교100주년기념관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어 마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곰골의 유래
웅동마을은 1780년경 전북 남원(南原)에 사는 곡부공씨(曲阜孔氏)가 화승총을 가지고 이곳 백운산 일대를 무대로 사냥하다가 이곳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문헌에 의하면 이보다 훨씬 앞선 고려(918~1392) 또는 그 이전에 당시 이 지역에 특수행정구역인 웅음소(熊陰所)가 설치된 기록이 있어 이보다 앞서 마을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1600년쯤에는 광양현 동면 진상리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진상면 웅동촌(熊洞村)이라 했으며, 1872년 왕명(王命)으로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이 지역을 웅동(熊洞)으로 표기, 지금까지 그 지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지세가 험하고 곰(熊)이 많다하여 ‘곰골’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풍수지리학상 마을형국이 곰의 모습이라 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곰골(熊洞)의 본래 의미는 큰 산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즉 곰은 산(山) 또는 크다는 뜻을 가진 옛말로 감→검→곰→금으로 변화를 거치면서 산과 관련된 땅이름을 남겨주었는데 큰 골짜기가 ‘곰골’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웅동(熊洞)이란 마을 지명이 전국에 걸쳐 있는 이유도 이를 뒷받침하겠다. 현재 마을회관 앞에는 곰 조형물이 마련돼 있으며 곰골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광양 최초의 교회
웅동마을은 광양시 최초의 기독교 포교 활동지로 기독교가 제일 먼저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광양기독교100주년기념관이 건립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관 옆에는 광양시 최초의 교회인 웅동교회가 아직도 그 위엄을 뽐내고 있으며, 교회 안 복도에는 웅동교회가 세워진 연유와 그에 따른 광양 기독교 유래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웅동교회가 세워진 연유를 보면 이렇다. 명성황후가 끌어들인 청나라가 동학난을 진압하러 오자 일본도 청과의 조약에 따라 함께 동학난을 진압하고자 조선으로 들어왔고, 결국 일본이 명성황후까지 살해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 자객 중의 한 명이 인천에서 살해를 당했다. 
한태원이라는 경기도 사람이 국모가 일본인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에 울분에 차서 제물포를 통하여 귀국하려는 일본 낭인을 쫓아가 살해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산세가 깊은 광양 웅동마을로 도망을 한다. 
웅동마을은 백운산 깊숙한 곳으로 당시에도 약 20세대만 살고 있었으며, 깊은 산중이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고, 자신을 숨겨달라고 했다. 당시 마을 주민인 박희원, 서병준, 장기룡씨와 마작을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광주에서 한 관리가 마을로 찾아와 이곳에 외지인이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추궁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침묵한다. 
관리는 이 어려운 세상에 노름을 하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서 광주에 있는 야소교(耶蘇敎)를 소개한다. 
관리의 설득을 받고 박희원, 서병준, 장기룡씨 등이 당시 광주에서 종교서적을 판매하고 있는 조상학씨에게 복음을 받고 오웬 목사에게 교리를 배워 웅동마을로 돌아왔다. 
이들은 과거 마작꾼들을 불러모아 방 한칸에서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웅동교회의 시초가 됐다.
현재 백학동 마을에서 웅동마을로 가는 길을 ‘성지로’로 명명하고 있는데 광양 최초의 기독교 도래지인 웅동마을로 가는 길, 즉 성지순례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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