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계마을은 수어댐 바로 아래에 위치해 마을 앞으로 수어천이 흐르고 갈대밭이 풍경을 이룬다.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 표지석, 마을전경, 마을회관, 차성진자선비, 수어천공원 등이다.

용계마을은 수어댐 바로 아래에 위치해 마을 앞으로 수어천이 흐르고 갈대밭이 풍경을 이룬다. 
마을주민들은 김 양식이 한창이던 당시에 이곳의 갈대를 이용해 섶, 김발로 만들어 판매하면서 경제 활동에 도움을 얻었다. 
예전만큼은 못해도 지금도 갈대를 구경할 수 있다. 현재 갈대가 있는 수어천 하구 주변은 양귀비와 코스모스를 덤으로 구경하며 그라운드골프를 칠 수 있는 수어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용계라고 불린 이유
용계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상리(津上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했으며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용계마을 지역 내에 신천촌(新川村)이란 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문헌사료에 의하면 새내다리 부근에 신천촌(新川村)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일명 ‘새내’, ‘깽변’이라고 불리었다. 그 당시 섬거역과 섬거포를 비견하여 수어천 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천(新川)마을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용계마을은 그 뒤에 불리게 된 이름으로 1780년 경에 밀양박씨(密陽朴氏)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입촌했다고 하며 당시 마을 앞으로 흐르는 수어천(水魚川) 가맛소에서 용(龍)이 나왔다고하여 용계(龍溪)라 했다고 전한다.
또 뒷산의 형국이 닭이 알을 품은 모습이다 하여 풍수지리학상으로 용계포란(龍溪包卵)형이라 한데서 유래되어 용계(龍溪)라 했다는 설도 있다. 
마을 모퉁이 북쪽에 가맛소가 있었으며, 그곳 주변에 정자나무와 정각이 있어 여름철 휴식처로 활용되어 왔으나 1974년 수어댐 건설로 사라졌다가 25여 년 전에 수어댐 바로 아래에 정각을 다시 세우고 주변에 공원을 조성했다.

■운고정과 차성진자선비
이 마을에는 운고(雲皐) 황하석(黃夏錫 1797~1864)의 휴식처로 쓰이던 장소에 퇴락 후 그의 5대 후손 황호일이 건립한 정자가 있었다. 1950년경 건립한 ‘운고정’이라는 정자인데 그 일대가 1974년 수어댐 부지로 편입되자 황죽리 죽림마을로 이축됐다.
황하석은 조선후기 유학자이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조정의 명에 의거 정려를 받았다.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창원 황씨 문중에서 광양 효자황하석비(孝子黃夏錫碑)를 건립했으며 현재 그 비가 죽림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마을에서 면소재지 방향으로 약 60m 떨어진 도로 서쪽에 차성진자선비(車性鎭慈善碑)가 있었다. 
이 비는 흉년에 가난한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준 차성진 공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건립한 것인데 2017년 진상면에서 1864년부터 1964년까지의 진상면 내 흩어져 있는 효자비, 자선비 등을 진상역 공원 내로 옮기면서 이 비도 함께 옮겨갔다.
차성진자선비 전면에는 ‘전 참봉차공휘성진자선비(前參奉車公諱性鎭慈善碑)’, 좌측 면에는 ‘진상옥곡면소작인입(津上玉谷面小作人立)’, 우측면에는 ‘신미사월일(辛未四月日)’이라고 새겨져 있어 1871년 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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