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전개과정 한눈에 보여주는 4.3평화공원 등 스템프 투어로 역사의 진실 알리려 노력

 

여순사건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있었던 제주4.3사건을 알아야 한다.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당한 게 여순사건이기 때문이다. 
제주4.3사건은 이 보다 앞선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두 사건 모두 6.25가 끝난 이후까지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진압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으며, 아직까지도 역사적 정의가 뚜렷하지 않아 앞으로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제주시는 제주4.3사건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국민의 아픈 역사로 인식하고 4.3이 전하는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살을 온몸으로 껴안은 제주의 상흔이 제주 곳곳에 펼쳐져 있으면서도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역사의 현장을 돌아볼 수 있게 다크투어리즘 스템프투어 등으로 제주4·3을 알리고 있다.

▲ 사진위는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 아래는 제주4.3평화기념관 상설 전시관 첫 시작을 알리는 동굴의 모습이다.

■제주 4.3사건이란
제주4.3특별법은 1947년 3월 1일을 4.3사건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이는 3.1절 경찰 발포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미군정의 탄압이 4.3 봉기의 주요 원인이라고 보고 있어서다.
1947년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았지만 여전히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38선 이남에는 미군이 통치하는 미군정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조짐이 나타나면서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점차 멀어져 가는 분위기였다. 
이에 1947년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도 1947년 3월1일 3.1절 기념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격분했고 이에 대응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 10일부터는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민·관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이후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여 시민들을 강제 진압하고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유격대 350명이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은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중산간 지대뿐만 아니라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1949년 3월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방침의 선무공작이 전개되어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산했다. 
그러나 선무공작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1,600여 명이 총살당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1949년 5월 10일에야 재선거가 치러졌고, 그해 6월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와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들이 또다시 희생됐다.
기나긴 수난의 세월을 보낸 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됐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1만 5천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 제주 4.3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고 있다. 사진은 4.3사건 희생자의 성명, 성별, 당시연령, 사망일시 등이 기록된 각명비의 모습.

■ 4·3의 역사를 한눈에 보다
제주4·3평화공원은 지난 70여 년간 해원 되지 못한 제주4·3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여 평화와 인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됐다.
2008년 3월 28일 제주시 봉개동에 자리 잡은 제주4·3평화공원은 한마디로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제주 사람들의 염원을 담았다. 
4.3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민간인학살과 당시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인권기념공원인 것이다.
제주4·3평화공원은 35만9,380㎡의 규모에 위령탑, 위령제단, 위패봉안실, 추모광장, 봉안관, 각명비, 행방불명자비, 제주4·3평화기념관 등을 설치해 놓고, 4.3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위령탑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화 된 대립을 화해와 상생의 어울림으로 표현하고 있고, 위령탑 옆으로는 4.3희생자의 성명, 성별, 당시연령, 사망일시 등이 기록된 각명비가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 숙연한 마음이 들게한다.
특히 공원의 핵심시설인 제주4·3평화기념관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온 4.3을 진실의 그릇으로 담고 있다. 지하 1층에 마련된 상설전시실은 4·3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다.
상설전시실 첫 시작은 역사의 동굴이다. 이 동굴로 들어서야 비로소 4.3의 역사가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4.3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인들은 살기 위해 산으로 오르거나 동굴로 숨어들었다가 토벌대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는데 이 공간을 통해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은 것.
동굴을 빠져나오면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비석 ‘백비’가 나오는데, 4.3의 바른 이름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후 공간에서부터는 해방 전 국제정세와 제주도, 해방이후 도민들의 자치열망, 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발포사건, 3.10 총파업과 탄압의 사건들이 1948년 4.3봉기로 이어지는 과정과 무장봉기 발생 과정, 한국전쟁 기간까지 제주에서 자행된 학살의 면모, 4.3진상규명운동 등 현재까지 이어진 역사적 진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루고 있다.
지하 1층에서 지상 4층 규모의 4·3평화기념관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을 따로 두고 있으며 다양한 도서를 비치해 놓은 도서자료실을 설치해 4·3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또한 영상관에서 4·3에 대한 영상을 상영하는 동시에, 4·3과 관련된 여러 학술대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4·3을 현대의 기억 속에 새기고 있다.

 양재생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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