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기무덤과 시비

제주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들이 모슬포주민들을 강제 동원시켜 세계2차대전 전쟁을 위한 비행기 격납고, 고사포진지, 지하벙커 등을 만들도록 했으며, 제주4.3사건으로 마을이 모두 불타 주민들이 야산에서 생활하거나 해변으로 흩어졌고 대규모 민간학살이 제주 곳곳에서 일어났다. 
제주는 제주의 다크투어리즘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군사기지화를 위한 군사시설과 4.3사건의 잔혹한 현장을 포함한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제주의 상흔은 제주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대규모 민간인학살 현장 북촌리
제주 북촌리는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로 4.3사건 당시 지역주민이 토벌대에 학살되어 제주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이곳은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지만, 서우봉과 접해있는 ‘해동’이라는 마을과 ‘억수동’이란 마을을 통해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을 많이 했던 지역이다. 해방 후에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됐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촌리는 국제법상 전쟁 중일지라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의 대표적 사례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1949년 1월 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이곳 북촌리에서 자행돼 주민 3백여 명이 희생을 당했다. 앞서 군인2명이 무장대에 습격을 당해 숨지자, 군인들이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3백여 명을 한 날 한시에 학살 한 것이다.
이는 제주 4.3사건 당시 단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왔다. 북촌리 주민 대학살 은 당시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됐다.
제주는 암울한 시대를 넘어 북촌리 주민들이 겪은 통한의 역사를 공감할 수 있도록 이곳에 너븐숭이4.3기념관을 비롯해 위령비, 순이삼촌비, 관람로 시설 등을 마련해 후세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너븐숭이4.3기념관 앞에는 작은 돌무덤인 ‘애기무덤’이 있다. 북촌리 주민 학살 사건 때 어른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에 안장 되었으나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이곳에 임시 매장한 상태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현재 20여개의 애기무덤이 이곳에 모여 있는데 적어도 8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애기무덤 앞에는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인 황요범의 ‘애기돌무덤 앞에서’라는 시비가 놓여 있다.

▲ 낙선동 4.3성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실제 주민의 집이 성터 안에 보이고 있다.

■사실상의 수용소 낙선동 4.3성터
제주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한 낙선동 4.3성터는 4.3사건이 일어날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석성(石城)으로 남아 있다. 당시 쌓은 성담이나 그것을 쌓은 사람들이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는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 전체가 불타 버렸다. 이에 마을 주민들은 인근 야산에서 생활하거나 동굴로 피신을 했다. 나중에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과 가족들은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했다.
그런 세월을 딛고 1949년 봄이 되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따라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종의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낙선동 축성작업은 선흘리 주민들만 아니라 조천면 관내의 타 지역 주민들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 학생들까지도 동원되었다. 강제로 동원한 축성 작업은 1949년 봄 한 달 동안 계속됐고 주둔소를 쌓은 작업보다 오히려 더욱 힘들었다. 마을을 돌아가면서 쌓는 성의 규모는 주둔소에 비해 훨씬 컸기 때문이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성 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했으며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고,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 대부분 자원입대한다.
선흘리 주민들은 1954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비로소 고향 마을로 돌아가 집을 지어 살았고 일부는 그냥 성안에 정착해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4.3당시 200세대가 성안에 살았으나 현재는 13호가 남아 있다.
낙선동 성담은 마을을 지켜주는 방풍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장 원형이 잘 남아 있다. 
2008년부터 2009년 10월까지 4·3 중요 유적지 복원 사업으로 성담과 초소 등이 정비되었고 현재는 고난스러웠던 4.3 삶을 증언하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은 제주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비행기격납고, 지하벙커 등을 만들도록 했다. 섯알오름 학설터에서는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을 당했다. 사진 위는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추모비이며, 아래는 알뜨르 비행기격납고 모습이다.

■알뜨르 비행장과 섯알오름 학살터
알뜨르비행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대정읍 상모리 아래쪽의 너른 벌판에 제주도민 등을 동원해 건설한 군용 비행장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 비행장을 전초기지로 삼아 약 700km 떨어진 중국의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오무라 해군 항공대의 많은 전투기를 ‘알뜨르’에서 출격시켰다.
그러나 1938년 1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오무라 해군항공대는 중국 본토로 옮겨졌고, 알뜨르비행장은 연습 비행장으로 남았다. 
이곳에 있는 비행기 격납고는 비행기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지붕이 잔디로 덮여있어 전투기를 은닉하는 것으로 활용됐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강제로 동원해 만들었으며 규모는 폭20m, 높이4m, 길이10.5m다. 당시 일제는 이러한 격납고 20기를 만들었는데 현재19기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이중 10기는 국가등록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또 비행기 격납고와 활주로가 조성된 사이에는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가 설치되어 있다. 이 지하벙커는 남북 방향으로 길이 약30m, 너비 약 20m 장방형 구조로 남쪽 입구에서 중심부 공간까지의 길이가 약 7m이며 오른쪽으로 2층 통로와 연결되어 있다. 통로 중간 지점에 지상부와 연결되는 통로 2곳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을 통해 지상부를 관찰한 것으로 보인다.
알뜨르비행장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지만 제주4.3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섯알오름 학살터 때문이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해 구축한 탄약고인데 해방직후 미군에 의해서 폭파되어 오름이 무너져 움푹 파인모습으로 남았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1만 5천명에서 3만 명의 양민이 학살된 제주4.3사건이 진정국면에 들어갈 무렵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치안국의 불법적 예비검열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정부는 후방에서 북한군과 결탁할 수 있다는 구실을 들어 예비검속 명령을 내렸고, 이 예비검속령으로 제주에서만 1천여명이 단속됐는데 이는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1950년 8월 20일 한림어업창고 및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63명, 새벽 5시경에 모슬포 절간 고구마 창고에 구금됐던 132명이 해병대 제3대대에 의해 폭파됐던 탄약고 터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하지만 당시에 바로 시신을 찾을 수 없게 하면서 6년이 지나 시신을 찾자 누구의 시신인지를 알 수 없었다. 현재 이 일대에는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추모비와 백조일손묘역을 조성하여 그 비극의 현장을 추모하고 있다.

양재생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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