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진월면 마을을 돌며 우편을 전하다보면 금세 밥 때가 찾아왔다. 손목시계를 들여다 볼 필요도 없었다. 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을이 국 끓이는 냄새로 가득 찼다. 동네 어르신들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도 나기전에 그를 붙잡았다.

“따순 밥 해놨응게 한술 뜨고 가”

그땐 그랬다. 밥 때 되어 찾아온 이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던 때다. 갓 지은 밥과 뜨거운 국, 수확한 작물로 간단히 만든 반찬. 거한 진수성찬은 아니어도 정이 가득한 상차림이 항상 그의 점심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부산에서 살다가, ‘ 고향에서 살자’는 아버지의 권유로 돌아온 광양. 23살에 시작한 집배일은 ‘사람의 정’이 매력이었다.

 서로를 참 많이 믿은 시절이기도 하다. 등기우편은 당사자의 확인 도장이 필요했다.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면, 사람들이 ‘안방 서랍장에 있으니 꺼내서 찍어 가라’고 했다. 김 주사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놀랄 일이야”라며 크게 웃었다.

 전화도 흔치 않고, 우편물 대부분이 편지였던 때. 특히 타지에서 생활하는 자식이 부모님께 묻는 안부편지가 많았다. 어르신들은 김 주사가 들고 오는 소식에 반갑게 뛰쳐나왔다. 편지를 받은 기쁨도 잠시, 어르신의 얼굴에 막막함이 비친다.

 

‘어이… 나가 눈이 어둡네’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다. 당시는 어르신들 뿐 아니라 농사를 업으로 하는 작은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다. 딱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자식의 편지를 읽지 못하는 아쉬움 정도였다. 김 주사는 그들의 집 안방에서, 마루에서 자식들의 편지를 읽어주며 함께 울고 웃었다. 간혹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막걸리 한통 사와달라’고 부탁했다. 마을을 오고가는 그의 손에는 막걸리와 편지가 늘 함께했다.

 김 주사가 집배원으로 일한지 34년이흘렀다. 진월면과 광영동, 중마동을 거치며 광양 지역의 변화도 몸소 겪었다. 특히 마냥 어리기만 했던 동네 아이들이 군대를 가고 결혼을 했을 때는 세월을 실감했다. 조그맣던 꼬맹이들이 그 시절 자신과 꼭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네올 땐 신기하게 느껴졌다.

 우편배달을 하다보면 다양한 일을 겪는다. 한번은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운전자는 찌그러진 차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사고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김 주사는 오토바이를 팽개치고 운전자를 꺼냈다. ‘대단하다’는 감탄에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며 멋쩍어했다.

 

“좋은걸 가져다 줘야 좋은 소릴 듣지”

 과거는 집배원이 집마다 밥숟가락이 몇 갠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서신이 많았다. 요즘은 고지서가 대부분이다. 소식을 전하던 사람에서 의미가 달라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김 주사는 하루 6시간을 밖에서 보낸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우편물을 배달한다. ‘어느 계절이 가장 좋냐’고 묻자, “움직이긴 겨울이 낫지. 여름엔 뛰 댕기도 모대”라며 껄껄 웃었다.

 퇴근 후에는 가족과 함께 산책을 한다. 아내와 함께 집 근처 공원을 사복사복 걷다보면 금세 시간이 흐른다.

 주말엔 진월면 고향집에 들러 농사일을 돕는다. 매실 철엔 매실 농사를 돕고, 감 철엔 감 농사를 돕고 있다.

 틈틈이 취미로 바둑을 두기도 한다. 같이 둘 상대가 없어 혼자 둔다. 한 때는 인터넷 바둑게임을 했다. 한번 컴퓨터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늘자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김 주사는 컴퓨터 바둑게임은 그만두고 바둑 TV를 보며 만족하고 있다.

 정년이 3년 남았다. 아마 퇴근 후의 일상이 퇴직 후의 삶이 될 것이다.

 추석연휴가 오는 12일부터 시작된다. 추석 연휴 일주일전이 1년 중 가장 바 쁜 기간이다. 김 주사님은 오늘도 열심히 ‘뛰 댕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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