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왠지 좋은 소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청쾌한 아침 하늘이 워낙 맑아서였을까, 바람이 시원해서였을까. 박근수 씨는 알 수 없는 기대를 품고 출근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건 광양제철소 발령 소식이었다. 포항제철소에서 2년째 근무하던 근수 씨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이미 포항에서 직업에 안정을 찾았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갈 일만 남았는데 타지로 가야하다니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사실이 그를 압박했다. 그리고 젊은 날의 근수 씨는 에라 모르겠다사표를 제출했다.

큰 결심을 하고서 낸 사표는 수리되지 못했다. 상사는 근수 씨에게 이미 광양으로 발령이 났으니, 광양에서 사표를 내야한다고 말했다.

광양서 시작한 스포츠 인생

1987, 근수 씨는 사표를 처리하기 위해 광양으로 내려왔다. 당시 광양제철소 고로도 아직 가동도 하기 전이었다. 생활관만 덩그러니 있고, 즐길 거리가 없었다. 순천 시내를 가려고 해도 1시간이나 걸렸다. 그는 따분한 생활을 참을 수 없어 등산을 시작했다.

배고프던 시절, 등산은 밥 먹고 하는 쓸 때 없는 짓이라 손가락질 받았다. 때문에 다른 등산객과 마주치면 반가움이 밀려왔다. 함께 산 정상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절로 친구가 됐다. 삐삐도 없고, 휴대폰도 없었지만 회사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졌다.

광양에 적응하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등산도 재밌었지만, 죽기 전에 도전하고 싶은 3가지의 스포츠가 생겼다. 행글라이더와 스킨스쿠버, 윈드서핑이었다. 근수 씨는 스포츠를 즐기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처음 도전한 익스트림 스포츠는 행글라이더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패러글라이딩이 도입되고, 30년간 패러글라이딩에 빠졌다.

그는 국내 패러글라이딩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광양에서 80여명이 넘는 회원을 모아 동호회를 만들었고, 대회에서 상도 휩쓸었다. 1999년도에는 전라남도 패러글라이딩 연합회도 만들었다. 체육활성화 공로를 인정받아 도지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연합회를 운영하며 전라남도의 이름을 걸고 대회도 개최했다. 6년간 구례, 보성, 곡성, 하동, 영광, 완도 등에도 클럽을 활성화 시켰다. 그 결과 전남은 패러글라이딩으로 으뜸가는 지역이 됐다.

이밖에도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활용해 배알도에서 인명구조 활동을 하는 등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완성하고 있다.

스포츠를 통한 봉사활동 시작

근수 씨의 취미는 봉사활동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불우이웃이나 장애인, 다문화가정을 위한 체험비행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폐쇄적이었던 다문화가정을 설득해 체험비행도 진행하고, 한글도 가르쳤다.

이를 계기로 여수MBC종이 비행기에 출연, 섬마을 아이들의 체험을 돕기도 했다. 특집편에서는 방송국과 광양시 사회단체의 도움을 받아 이주여성의 친정방문을 도왔다. 봉사가 봉사로 이어져,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다문화가정의 합동결혼식도 추진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은 봉사활동은 시각장애인들의 체험비행이다.

근수 씨는 시각장애인은 하늘을 나는 기분을 잘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그러나 비장애인보다 더 즐거워하고 흥겨워하는 모습이, 더 많은 봉사활동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 쏟는 열정 같아야

자신이 구축한 삶 안에서 꿈을 실현하고 있는 근수 씨. 그는 일과 꿈에 쏟는 열정이 같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나씩 하고 싶은 걸 이루며 살다보니, 일도 꿈도 중요하다 느낀다. 회사는 근수 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 직장에서의 열정과 꿈을 실현하려는 열정이 같아야 한다.

그는 어차피 하루 24시간은 흘러가는데 스트레스 받고 화내기보다 웃으며 보내는 게 좋다많은 청춘들이 일과 꿈을 별개로 보지 않고 행복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스포츠를 통해 기술과 기량을 만들어 가며 얻는 성취감이 호연지기를 키우는 것 같다앞으로도 스포츠와 봉사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편 근수 씨는 마지막 버킷리스트인 윈드서핑을 배우는 중이다. 한 달째 초보 윈드서퍼로 활동 중인 그의 스포츠 인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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