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나이가 든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시대가 그래서,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이들 중 하나였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여섯 명의 자녀를 키우다 보니 어느새 74세가 됐다. 박운남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최근 한글을 배운 이후로 평생 웅크려있던 꽃봉오리가 피어난 것 같다는 박운남 할머니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글로 써내고 싶다고 한다. 이야기가 책으로 세상에 나오기 전에 먼저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광양시대신문의 특집 보도 ‘인제 서러운 세월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싶소’는 2주에 걸쳐 엮어갈 예정이다. <편집자 주>
 

박운남 할머니(74)는 최근 전남 문해의 달 시화전에서 최우수상 격인 ‘도지사상’을 수상했다.
박운남 할머니(74)가 환하게 웃고있다. 그녀는 최근 전남 문해의 달 시화전에서 최우수상 격인 ‘도지사상’을 수상했다.

엄청난 세상을 살았제…
기역자 하나 몰르고 살았응께 한이 너무 많은 사람이어요, 내가. 광영동 우쪽에 의암이라고 있제? 1947년도에 거그서 태어났는디, 엄마 아빠가 못 만날 부부가 만났능가. 나 하나를 낳고 헤어졌어.

그 옛날인디도 우리 엄마가 아부지를 마다혔데요. 여자가 마다허믄, 남자는 밖으로 나돌아. 결국 아부지가 장성서 재혼해 살믄서 5남매를 낳았어요.

아빠가 안들어온게 할머니가 엄마헌티 “너는 너대로 가서 새출발해라” 혔지. 근디 그러고 울 아버지도 명이 짧아 진즉 가셨어.

그러고 할머니가 나를 업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텀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밑에서 크면서 고생을 좀 많이 혔지요. 세상서 젤루 서러운 것이 부모 없이 크는거여요. 엄마 아빠 없는 것은 방법이 없자네.

14살부텀 식모살이를 혔을거에요.
살아온 이야기를 말로는 다 못하제. 그 서러운 이야기를 누를 보고 다 하겄어. 광양서 태어나 광양을 안 떠나고 살았은게.

지금은 여자들이 다닐데가 많은디 그때는 그런 게 없었어요. 넘의 집을 가면 식모살이나 하고, 아니믄 공장엘 다녔잖어요 시대가.

처음 봉강서 식모 살 때 하도 힘들어서 뛰쳐나오기도 혔어요. 그때가 4월이나 됐는가봐. 봉강서 옥곡까지 코고무신을 신고 걷고 또 걸었제.

산을 타고, 내리막길 오르막길을 걸어간께 신발 콧등이 찢어졌지. 옷핀으로 집어서 신고가다 또 찢어지고, 찢어지고…. 결국 맨발로 걸었어요.

그렇게 집엘 갔는디 맞을까봐 무서워서 화장실서 몰래 잤어요. “너가 어디가서 살거냐” 그 소리 안듣고 싶어서.

작은 아버지랑 작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후에 들어갔더니 할머니가 나를 껴안고 울었어요. “아이고 어찌까나…네가 돌아왔으니 또 뭔 소릴 안하겠냐” 허시면서.

오는 길에 신발이 찢어지고 없으니 동네 일 도와주고 돈을 좀 받아서 신을 사 신었어요. 그러고 광양읍에 또 식모살이를 갔지요.
 

할머니가 간직한 가장 젊은 날의 사진. 30세 당시 박운남 할머니가 동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할머니가 간직한 가장 젊은 날의 사진. 30세 당시 박운남 할머니가 동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우리의 젊은 시절 모습을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한 친구의 제안에 곱게 차려입고 사진관으로 향했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이는 세월의 흔적이 박운남 할머니의 눈부신 시간을 말해주는 듯 하다.

19살에 날 버리고 간 엄마가 나타났어요.
내가 식모살이 한단 걸 알고 찾아왔더라고. 날 보더니 대뜸 “식모 사는 것 보다 나으니 시집을 빨리 가거라” 하는거지.

그래서 어른들 시키는 데로 19살에 아무것도 모르는데 시집을 갔어요.

완전히 산간백지로 시집을 갔제. 쩌그 옥곡에 짝빡구리라고 있었어요.

그때는 길도 좋지 않고, 냇물에 바웃돌을 놔서 건너가고 그랬지. 보통 시집갈 땐 가마를 타고 많이 갔는데 난 그 산골짜기를 또 걸어갔어요.

남편 얼굴? 당연히 몰랐제. 어른들끼리만 서로 알고 시집을 간 거야.

남편은 셋째 아들이었는디 내가 시부모님을 다 모시고 살았어요.

결혼허고 아들 둘에 딸 넷, 총 여섯을 낳았어요. 근디 아저씨가 술을 좋아하셔갖고 간경화로 일을 못혔어요. 없는 시골 살림에 간경화로 고생하다보니 병원 다님서 빚을 많이 졌지요.

남편이 아픈 게 나가 동네사람들이랑 품앗이로 농사를 쬐끔씩 졌어요.

딱 1년을 했는디 나 계산엔 이걸로 여덟 식구 먹고살 순 없더라고. 그려서 막내 작은 엄마헌티 “암만해도 그 산중서 먹고 살 수가 없다” 했어요. 마침 그때가 광양제철소를 매립할 때라, 함바식당엘 나가게 됐제.

나는 37살이었는데, 막 막내아들을 낳은 지 1년 됐을 때 였어요. 함바식당은 숙식하며 다녀야 혀서 거그서 먹고 자야하니 한 달에 두 번 집엘 갔죠.

돌도 안 지난 애를 집에 두고 식당서 사는데 너무 보고 싶고 가고 싶어 잠을 잘 못잤어요. 나는 돈을 벌고 막둥이는 시어머니랑 딸들이 돌봤어요.

박운남 할머니가 그린 그림과 글씨체. 문해의 달 시화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편집했다.
박운남 할머니가 그린 그림과 글씨체. 문해의 달 시화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편집했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 몸띵이에 일곱이 붙었더라고.
우리 아저씨가 간경화로 8년을 고생하다 내가 39살에 가셨어요. 나는 이제껏 거의 식당일만 하고 살았지요.

애들 키움서 식당생활 안하려고 제철 협력업체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여수산단 생기고 나서 거그서도 일해보고, 율촌공단도 출퇴근 했지.

그래도 결국 식당일을 젤루 많이 했어요. 처음 했던 함바식당을 그만두고 제철단지에 처음 생긴 학교 구내식당서 참모로도 일했어요.

점심 이후에 식당일 마치고 오후에는 단지 내에 파출부 일을 했지요.

그때 한 사모님이 “아줌마는 어째서 여기 파출부로 들어오게 됐어요”하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모님이 애들 옷이랑 애들 참고서를 챙겨줬지요. 그게 참 많은 도움이 돼서 애들을 키웠어요.

‘다리목 식당’이라고 밥집을 차린 적도 있지요. 제철 내에서 일했던 게 있어 그른가 손님들이 다 제철 사람이었어. 그분들이 “음식이 정말 맛있다”며 올 때마다 참 고마웠어요.

그렇게 애들 여섯을 다 키웠어요. 내 자신을 뒤돌아보면 “아…. 열심히 잘 살았다, 잘 살았다” 그런 생각을 해요.

자식들이랑 두런두런 밥 먹다가 애들이 요즘 힘들다 하면, “엄마는 더 힘들게 살았잖냐. 엄마 사는 거 보고 살았으니 열심히 살어라” 그러지요.

아이고 어째 내가 말이 너무 많았제? 우리 엄마 이야기도 해야 헌 디 할 말이 하도 넘친 게 그려요. 시간 더 있으믄 나 살았던 이야기 더 들어 볼랑가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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