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나이가 든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시대가 그래서,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이들 중 하나였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여섯 명의 자녀를 키우다 보니 어느새 74세가 됐다. 박운남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최근 한글을 배운 이후로 평생 웅크려있던 꽃봉오리가 피어난 것 같다는 박운남 할머니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글로 써내고 싶다고 한다. 이야기가 책으로 세상에 나오기 전에 먼저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광양시대신문의 특집 보도 ‘인제 서러운 세월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싶소’는  2부로 마무리된다. <편집자 주>
 

박운남 할머니의 -어머니 옛날-
박운남 할머니의 -어머니의 옛날-

인제 울 어머니 이야기 한번 들러볼란가요?

친정 엄마는 나헌티 너무 독하셨어요. 나 어렸을 적에도, 당신 재혼하고서도 과자 한 봉다리 해준 적 없었지요. 앞전서 말헌 것처럼 19살에 나타나선 시집보낸 게 다여요.

엄마는 아버지랑 헤어지고 나서 아들이 둘 있는 집엘 재혼 했더라구요. 본인 자식은 못 낳으셨고, 그 집 아들 둘을 다 키웠어요. 그러다 재혼한 남편이 먼저 돌아가셨지요.

살고 있던 좋은 집은 큰아들 주고, 엄마는 작은 집에 혼자 살았어요. 그러는 동안 그 집 식구들 누구도 엄마를 들여다본 사람이 없었지요. 아들 둘을 키워줬는데도.

장례 치르고 남편 앞으로 나온 퇴직금을 남편 형제들이 챙겨줬다는데, 엄만 고스란히 조카딸에게 줬어요. 나가 좁은 소견인지 모르겄지만, 그때 참 많이 서운하더라고요.

‘엄마라는 글자가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하고… 참 힘들게 살적이어서 그렸는가봐요. 그래서 1년 동안 엄마를 안봤어요. 당시 율촌산단에 출퇴근을 했는데, 엄마 있는 마을을 지나갔어야했지요. 서운키도 허지만 마음에 많이 걸리더라고.

결국 아들이랑 사위헌티 “암만해도 내가 일도 바쁘고 그런데, 마음에 걸려서 도저히 안되겄다. 외할머니헌티 좀 갔다 오니라”혔죠. 그렸더니 그 날 작은 옷 보따리를 싸들고 집엘 모시고 오더라고요. 그렇게 엄마랑 같이 살게 됐어요.
 

(왼쪽) 박운남 할머니의 어머니와 (오른쪽) 박운남 할머니의 사진
(왼쪽) 박운남 할머니의 어머니와 (오른쪽) 박운남 할머니의 사진

엄마는 당신이 키운 아들들한테 다 걸고 살었나봐요.

그렇게 살았는데, 영감 가고 자식들이 찾질 않으니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어요. 술에 담배에 거의 폐인생활을 하셨죠.

그때가 광양 도월리에서 셋집을 얻어 살 때였어요. 한날 일을 다녀오니 장판이 불에 탔는가 어쨌는가, 돌돌돌 그을려 있더라구요. “엄마 왜 이랬는데?”하니 “몰라”하시더라고. 재차 물어도 계속 모른다는 거여요. 치매가 오셨는가 싶어 그 길로 엄말 모시고 병원엘 갔죠.

검사를 하고난게 의사선생님이 입원을 권혔어요. 담배랑 술을 많이 했던 게 치매랑 겹쳐서 건강이 망가졌죠. 삐쩍 마르고, 갑자기 욕을 하고 정신을 놨어요.

병원 간병인들이 사정을 다 아니께, 내가 가면 엄마헌티 “아이고 딸왔네!”해도, 엄만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어요. 내가 “나 누구야?” 물어봐도 “몰라!”하고 절대 딸이라고 안혔죠.

그렇게 10년을 더 살다 가셨어요. 어느 날 원장님이 “암만해도 어머님이 가실 것 같습니다. 오세요” 하셔서, 그날 가서 엄마랑 같이 자고 했죠. 그런데 안가시더라구요. 뒷날 집에 가서 잠깐 씻고 눈 붙이려 누우니까 전화가 온거야. 그래서 또 부랴부랴 갔더니 삶을 붙잡고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엄마헌테 그랬지. “뭣이 그렇게 힘듭니까. 뭐가 그렇게 미련이 많이 남아요. 좋은데 가서 편히 쉬셔요”하고 한참 손을 잡고 있었어요. 마지막에 날 탁 쳐다보시더라고. 그러고 눈 감고 가셨어요, 88세에.

나 하나를 놓고, 핏줄이라곤 나 하난께… 그래도 엄마가 돌아가실 때는 “나가 잘못혔다. 고생혔다” 이 두 마디는 꼭 할 줄 알았거든요. 기대를 혔지. 그런데 그 말도 안하시고 가시더라고. 지금도 생각하면 서운해요, 엄마한테. 엄만데…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와 함께

사람들이 나빴던 게 아니라 시대가 그랬다고 생각해요.

물론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너무 슬프죠.

그 설움 맞았던 거 배고파서 굶주리고 살았던 거. 어릴 적 작은집서 배가고파 고구마 하나 내려먹으면 엄청 뚜드려 맞았던 거.

그래서 지금도 생각하면 잠이 안 오고, 얼른 잊어야 허는데 그것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가요.

그럴 땐 내가 내 자신을 위로 하죠. 그때는 시대가 그랬고,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게 산게 그랬고, 그러면서 위로를 해요.

요즘도 세상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엄마로서, 여자로서. 우리 엄마를 보면 자기가 태어나 세상을 살았다는 증거가 없잖아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한 가지는 해놓고 가는 게 정답인데, 우리 어머닌 그걸 못했지요.

‘엄마처럼은 안 살아야지’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애들 여섯을 품고 키웠죠.

문해의 달에서 받은 상을 누구한테 돌리냐고 묻길래, “나는 나한테 주고 싶다” 그랬어요. 내가 열심히 잘 살아서 이런 날도 왔다고.

글 선생님한테도 그 얘길 하니 “아이고 잘했네!” 박수를 치더라고요.

저는 인제 나이도 먹고 인생을 많이 살았어요. 그래도 글 배운김에 더 공부해서 살아온 이야기를 한 글자도 안 빠트리고 다 쓰고 싶어요.

한 가지 소망으로 내가 걸어온 길을 흔적으로 남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정도면 참 보람 있는 세상 살았지 않았나요?

내가 하고 싶은 공부 배워나가는 중이지, 애들 여섯 다 키워 잘 살고 있지…

그래서 항상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참 많이 써요.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쉽게 하는 말이에요. 내가 다리만 안 아팠으면 좋은 일 더 많이 할 수 있었겠다, 아쉽기는 하죠. 남들 맹키로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몸이 건강하면 할게 더러 있을 텐데 하고요.

또 주위를 돌아보면 내가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주위에 좋은 분들이 참 많았어요. 그 사람들이 나한테 돈을 보태줘서가 아니고, 말이라도 안아주는 말. “참 열심히 산다. 힘들지? 좋은날 올거여”하는 다정한 말이 돈보다도 좋았어요.

물질적은 것은 항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정한 말 한마디가 참 커요. 남의 것 욕심내지 말고, 헐뜯지 말고. 어려운 사람은 좀 다독여주고 외로운 사람에겐 벗이 되어주고. 그리 살면 좋은 날이 와요. 다들 그렇게 살았으면 좋겄어요.

아유 별 얘길 다했네요. 긴 이야기 들어줘서 참 고마워요. 다들 복 받고 살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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