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망마을은 망덕산 안쪽에 위치한 마을로 장재마을을 마주하고 있다. 사진은 위에서 부터 망덕산, 마을표지석, 채구연의 묘, 마을전경, 김해허씨 열행비, 마을회관 순이다.
내망마을은 망덕산 안쪽에 위치한 마을로 장재마을을 마주하고 있다. 사진은 위에서 부터 망덕산, 마을표지석, 채구연의 묘, 마을전경, 김해허씨 열행비, 마을회관 순이다.

내망마을은 망덕산 문턱에 자리한 마을로 장재마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남해고속도로로 들어서는 진월IC가 마을정면에 있고 망덕산이 마을 뒤에서 수호신처럼 마을을 보호한다. 내망에서 태인도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망덕산과 천왕산을 잇는 출렁다리가 보인다.

■명당의 보호아래 있는 마을

내망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진하면(津下面)에 속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진하면 덕망촌(德望村) 지역이었으며 1872년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망촌(望村)지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내망마을은 약 430년 전 인천채씨(仁川蔡氏)가 처음 입촌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는데 관련 문헌을 참고하면 이보다 앞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망(內望)의 이름 유래는 ‘망탱이, 망댁이’에서 연유된 이름으로 망덕산 안쪽에 위치한다하여 외망마을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내망(內望)이라 했으며, ‘안망댁이’라고도 부른다.

망덕산(望德山)은 해발 197m로 나지막한 산이지만 남해안 한려수도와 접하고 있어 조금만 올라도 훌륭한 조망을 선사한다.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됐으며 임진왜란 시에는 왜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전망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망덕산 부근은 천자봉조혈(天子奉朝穴)의 명당이라 하여 과거에 풍수가들이 많이 찾았다고 전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망덕산 천자봉조혈은 ‘왕비(王妃)가 날 자리’라는 의미로 왕비를 보고 배알하는 형국이라고 전하며, 망덕산 뒤에 위치한 천황산은 이름 그대로 왕을 상징하고 있다.

■채구연의 묘와 열행비

내망마을 유적으로는 망덕산 북쪽에 임잔왜란시 순절한 채구연(蔡九淵) 의사 묘가 있다. 채구연(蔡九淵)은 조선중종 23년(1528년) 2월 14일 광양현 진하면 장치리(진월면 망덕리 장재) 출신으로 자는 자정(自靖), 호는 청허(聽虛)다. 

그의 나이 36세 되던 해인 명종 19년 갑자년(1564년)에 과거에 합격해 선조 신묘년(1591년)에 밀양부사(그때 나이 64세)에 임명됐다. 

노쇠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임 즉시 성지를 수리하고 병졸을 훈련시켜 공수를 굳게 했다. 

1592년 4월 과로로 밀양부사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박진(朴晋)이 임명되었는데 밀양백성들이 난국을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인 채구연을 다시 유임시켜 줄 것을 경상감사에게 진정, 하회를 기다리던 중 동년 4월 15일 부산·동래·울산이 왜구에 점령당하자 밀양부사 박진과 함께 전투에 임하다 성이 함락되자 장렬하게 맞서 싸우다 밀양성에서 순절했다.

동년 10월 선조는 공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어명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석구를 갖추고 제전(祭田)을 수여하고 수호인을 두어 묘역을 보호토록 했다. 

당시 함께 싸우다 전사한 군관과 막하동지 6명을 공의 묘지에 속장(모두 10기)토록 선조가 허락했다고 전한다. 

채구연(蔡九淵)의 묘는 전투 중 그가 순절하였던 밀양에 있었는데 후에 이곳 망덕산으로 옮겨왔다. 

그의 묘비에는 밀양부사채공구연묘비명(密陽府使蔡公九淵墓碑銘)이라고 적혀있다.

또 내망마을에는 망덕포구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길가에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열행을 기리는 열행비(烈行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976년에 건립돼 오가는 이들이게 귀감이 되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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