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동마을은 예전 포구를 지녔던 마을이지만 포구가 없어지면서 이름도 바뀐 마을이다. 사진은 마을전경, 마을표지석, 2호선 국도, 마을회관, 신구저수지 등이다.
구동마을은 예전 포구를 지녔던 마을이지만 포구가 없어지면서 이름도 바뀐 마을이다. 사진은 마을전경, 마을표지석, 2호선 국도, 마을회관, 신구저수지 등이다.

구동마을은 진월면 신구리에 위치한 마을로 앞으로는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뒤로는 삼봉산과 깃대봉을 경계로 진상면 지원리와 인접해 있다. 거리상으로는 진월 신기마을과 추동마을이 가까워 세 마을이 삼각형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듯하며, 마을 입구 진입로 바로 위에는 광양·진주를 잇는 국도 2호선이 지나고 있다.

■굴레 같은 포구를 지녔던 마을

구동마을은 국가주요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구량포소(九良浦所)라는 행정구역이 있었다고 기록으로 전하고 있어 고려(918~1392) 또는 그 이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래 마을의 원 터는 특정지명으로 남아있는 ‘고무리’ 지역 부근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마을 내용은 알 수 없고, 문헌상 기록을 살펴보면 1600년경에 광양현 동면(東面) 월포리(月浦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월포면에 속했다.

구동마을은 예전에는 그 이름이 지금과는 달랐다. 

구동마을의 처음 이름은 구량포(仇良浦)인데, 여기서 포(浦)는 ‘개’ 즉 포구를 뜻하는 말이므로 구량(仇良)이 고유의 마을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주민들이 부르는 ‘구러개·구로개’에서 연유된 지명으로 마을지형이 ‘굴레(勒)’같이 생겼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즉 굴러개, 구러개, 구로개로 변화되었는데 굴레 같은 모습을 한 마을에 위치한 포구를 뜻하며 이를 한문식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구량포(仇良浦)로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다가 ‘비둘기 구(鳩)’자와 ‘개 포(浦)’를 사용하여 구포(鳩浦)라 하였고 뒤에 포구가 없어지자 구동(鳩洞)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 마을로 들어서는 진입로에는 구동마을 표지석이 있으며, 그 표지석 위에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비둘기 석상이 놓여 있어 마을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신구저수지와 금안골

구동마을 서북쪽에 있는 산봉우리를 국사봉이라 부르며 그 꼭대기에 옛날 봉화대 흔적이 있다. 일제시대 깃대를 꽃아 측량할 때 이곳을 깃점으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깃대봉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서북쪽, 즉 신기마을과 구동마을 사이에 저수지가 있는데, 신구저수지 또는 오사저수지로 부른다. 이 저수지는 1978년에 준공된 141ha 유역면적을 가진 계곡형 저수지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다. 저수지가 산 정상부근에 자리해 상류 오염원이 전혀 없어 수질이 비교적 깨끗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수지 위쪽에는 큰 바위 하나가 있으며 마을사람들은 이를 ‘가마바구’ 또는 ‘가메바구’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 바위가 마치 가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마을 남서쪽에 금안골 또는 금오곡(金烏谷)이라고 하는 골짜기가 있는데 금까마귀가 송장을 쪼는 금오탁시혈(金烏啄屍穴)의 명당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여순사건 직후 이 금안골에서 좌익의 사상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구동마을은 군과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었고,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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