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두마을은 원래 신풍 또는 신풍쟁이 마을로 순천 신대리 봉서마을과 인접해 있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선황비, 마을회관, 마을돌담길, 표지석 등이다.
신두마을은 원래 신풍 또는 신풍쟁이 마을로 순천 신대리 봉서마을과 인접해 있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선황비, 마을회관, 마을돌담길, 표지석 등이다.

신두마을은 광양읍 세풍리에 속한 마을로 세승마을과 해두마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순천시 해룡면 신대리 봉서마을과도 인접해 있다. 세풍이라는 지명이 세승마을의 앞글자인 ‘세’와 신두마을의 옛 이름인 신풍마을의 ‘풍’자를 조합해서 붙여진 이름이기에 신두마을은 세풍의 대표 마을이라 하겠다.

■신풍을 기리다

신두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 는 인덕면(仁德面)에 속했고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인덕면 신풍촌(新豊村)이었다.

마을이 처음 형성하게 된 것은 박(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입촌하면서라고 전한다.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박씨(朴氏)들이 임란을 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1592년 이전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두(新頭)마을의 원래 이름은 ‘신풍(新豊)’ 또는 ‘신풍쟁이’였다. 신풍마을 아래 쪽에 해두마을이 있는데 1975년에 신풍(新豊)과 해두(蟹頭)를 병합하면서 양 마을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신두’로 사용했다. 

후에 행정상의 지명으로 신두와 해두가 다시 분리되었는데 옛 신풍마을은 그대로 신두(新頭)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마을 사람들은 양 마을의 분리로 그 의미가 상실된 신두(新頭)라는 이름 대신 본래의 이름인 신풍(新豊)으로 해야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풍(新豊)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삼국지에서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 태조가 아버지인 태상왕을 고향으로부터 수도로 모셔오는데 태상왕이 고향을 떠나는 것을 매우 섭섭하게 여겨 수도의 한구석에 태상왕과 같이 살았던 이웃 사람들을 함께 이주시키고 고향 풍시(豊市)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신풍(新豊)이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 신풍이라는 이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을에 선황비(先皇碑)를 세워 매년 제사를 지냈다.  선황비는 자유당 때 세승 사람들과의 마찰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후에 복구하여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이 신풍이라는 이름을 염원했음이 짐작된다. 현재 선황비는 마을 북동쪽 언덕 위에 마련돼 있다. 

■돌담길이 주는 정겨움

신두마을 입구에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그 앞으로 펼쳐진 마을 진입로를 통해 조금만 올라가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신두 마을회관은 1994년 준공된 1층 건물로 다른 마을에 비해 작은 규모다. 

하지만 회관의 지붕 위로 태극기와 광양시기가 함께 게양돼 있어 이를 찾는 데는 어렵지 않다.

마을로 들어서면 하얀 돌담길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광양시가 활기차고 살기 좋은 마을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2020년 농촌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의 담벼락을 새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돌담을 자세히 보면 하얀 벽돌 위에 자연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 조성된 마을의 돌담길은 마을 전역에 있어 마을을 방문한 이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신풍마을 앞에는 조그만한 고개(등)가 하나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등(嶝)을 ‘벼룩등’이라고 부른다. 

이는 신두마을이 기러기 형국인데 마을 앞의 조그마한 등(嶝)이 벼룩같이 생겨서 벼룩이 기러기를 쪼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또 마을 서북쪽에는 신풍저수지가 있고 그 위쪽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갓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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