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본마을은 화살대가 많이 나는 옛 고장에서 시작된 마을이다.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마을표지석, 위령비, 마을회관, 지석묘, 당산나무 등이다.
산본마을은 화살대가 많이 나는 옛 고장에서 시작된 마을이다.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마을표지석, 위령비, 마을회관, 지석묘, 당산나무 등이다.

산본마을은 옥룡면 산남리에 속한 마을로 월파마을과 남정마을 사이에 있다. 이 마을의 표지석은 마을의 시작과 끝을 알리며 큰 길가를 기준으로 두 곳에 나눠 있는데, 하나는 월파마을을 지나 큰 정자나무가 있는 길가 오른편에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재동교 가기 전 마을 뒷길로 들어서는 진입로 모퉁이에 있다.

■산밑에 형성된 마을

산본마을은 청동기시대 사람의 시체를 매장했던 지석묘와 그 당시 생활 흔적인 무문토기, 경질토기편들이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연혁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00년경에는 광양현 북면(北面) 옥룡리(玉龍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룡면에 속했으며 1789년경에는 옥룡면 전본촌(箭本村)이라 했다.

마을에서 전하는 이야기로는 1850년경 밀양박씨 박수검(朴守儉)이 처음 이곳에 정착했다고 하나 실제는 이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옛날 본래의 마을 터는 현재 산본저수지 안쪽으로 원동(元洞)이라 부른다.

전본촌(箭本村)은 문헌상으로 1789년경에 나타나는데, 말 그대로 ‘화살 전(箭)’자를 사용해 ‘화살대(竹) 밭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다. 산밑 서쪽 전본촌 일대에는 현재도 화살대가 많이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묶은똠’이라고 한다. 

이후 산본(山本)마을이라고 이름을 바꿨는데 본래 마을 터에서 산밑으로 이전해 마을을 새로이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산남리(山南里)라는 이름 유래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당시 산본리(山本里)와 남정리(南井里)를 병합하면서 각 마을 첫 글자를 따서 산남리(山南里)라 했다.

■백운산지구 전몰장병 위령비

산본마을에는 모두 5개소에서 15기의 지석묘가 조사됐다. 

이 중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은 마을 북쪽 남정마을과 경계를 이룬 고갯마루다.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마을 우물이 나오는데, 이 우물을 끼고 남정마을로 향하는 고갯길로 들어서면 구릉 능선에 자리해 있다.

이 지석묘들은 구릉 방향과 같은 동서 서열로 10기가 분포되어 있으며 5m×25m 범위 안에 군집을 이루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이 지석묘를 ‘칠성바우’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특별한 위령비가 존재한다. ‘백운산지구 전몰장병 위령비’로 재동교 왼편 마을 앞산 입구에 위치해 있다. 이 위령비는 1953년 백운산 공비 토벌 시 전사한 허정수(許正水)소령 이하 44명의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됐다. 1953년 육군 870부대 장병들이 순직한 동료들을 위해 세웠는데 2002년에 규모를 정비하여 새롭게 단장했다.

위령비는 여순사건의 아픔과 6.25전쟁의 상흔과 고통이 남아 있는 중요한 현장으로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통일교육을 위한 산 교육장소로 운용되고 있다.

백운산지구 전몰장병 위령비에는 “깊이깊이 굳게 맺힌 원한 그 응어리 풀지 못한 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이 나라 겨레 위해 아낌없이 바침으로 그대들의 공훈은 청사에 기리 빛나리니 풀지 못한 통한은 그만 푸소서. 생사와 고락을 같이했던 우리들이기에 가지가지 옛 추억이 마음에 고동치니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듯하오. 후대, 후손에게 뼈아픈 역사가 다시없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오”라고 적혀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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