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酒登驛路上(주등역로상) 

                                              운곡 원천석

        봄추위 기승 속에 도랑의 밭을 가리

        지는 꽃 비둘기 적적하기 그지없고

        촌 아이 나물 캐느라 이따금씩 보이네.

        一分春寒猶未退    雨催耕種水生渠

        일분춘한유미퇴    우최경종수생거

        落花寂寂鳴鳩外    時見村童拾野蔬

        락화적적명구외    시견촌동습야소

일편단신이라고 말한다. 한번 마음으로 정을 주었다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시조의 큰 어른 한 분을 만나는 듯하다. 망해가는 고려 왕조를 회고하고 있는 내용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를 우리는 기억한다. 이런 마음 주섬주섬 담아 지는 꽃 비둘기 울음 적적한데 나물 캐는 촌아이들이 이따금 보인다고 애절히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도랑에 흐른 빗물은 밭 갈기를 재촉하구나(酒登驛路上)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1330∼?)으로 고려 말의 절신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봄추위가 아직도 끝나지를 않았는데 / 도랑에 흐른 빗물은 밭 갈기를 재촉하는구나 // 지는 꽃 비둘기가 울음 적적하기 그지 없는데 / 나물 캐는 촌아이들이 이따금씩 보이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주등역의 노상에서]로 번역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주등역(酒登驛)은 경북 영덕현 동쪽 9리에 있고, 주등원은 주등역 곁에 있다’라고 하고 있다. 1914년 3월 1일 부군 통폐합 때에 영덕면이 생기면서 동면에서 이속하여 오면서 생긴 이름이겠다. 시인이 마침 이곳을 지나면서 시상을 일으킨 것이 시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봄추위가 늑장을 부렸던 모양이다. 시인은 이런데 착안하여 봄추위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시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멋진 시상을 만나게 된다. 도랑에 흐른 빗물은 밭 갈기를 재촉한다는 표현에서다. 도랑이 밭 갈기를 재촉할 수 없었겠지만 시적인 표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봄비가 내려 도랑을 촉촉하게 적시며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렸음을 감지한다.

 때 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울며 지나갔던 모양이다. ‘구구구’하는 울음소리가 화자의 귀에 들리기에는 매우 적적하게 들리면서 나물 캐는 촌아이들이 이따금 눈에 보였다는 점으로 시상을 얽혀 놓았다. 주등역을 지나면서 한적한 농촌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에 곱게 담아 둔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봄추위 끝나지 않고 도랑 빗물 밭 갈기 재촉, 비둘기 울음 적적하니 촌아이들 이따금씩’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1330∼?)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이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정용별장 원열이며, 아버지는 종부시령 원윤적이다. 원주원씨의 중시조로 알려진다. 어릴 때부터 재명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가 있고 학문이 해박해 진사가 되었다.

【한자와 어구】

一分: 조금. 작은 단위 春寒: 봄 추위. 猶未退: 아직 끝나지 않다. 雨催: 봄비를 재촉하다. 耕種: 밭을 갈다. 水生渠: 도랑에 흐르는 물. // 落花: 지는 꽃. 寂寂: 적적하다. 鳴鳩外: 멀리 비둘기 우는 소리. 時見: 때대로 보이다. 村童: 촌 아이들. 拾野蔬: 나물을 캐다. 들나물을 손에 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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