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동마을은 ‘목골’이라 불리던 마을로 예부터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은행나무, 우물, 마을회관, 이채한 신도비, 표지석 순이다.
항동마을은 ‘목골’이라 불리던 마을로 예부터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은행나무, 우물, 마을회관, 이채한 신도비, 표지석 순이다.

항동마을은 잼비산(116.8m) 능선 하단부에 자리한 마을로 진월면 중산마을과 진목마을 사이에 있다. 마을은 진월면 진정리에 속한 자연마을로 20호 남짓한 농가만이 살고 있다. 다압면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마을이 있지만 이와는 다르다. 

■ 고개 밑이란 뜻의 마을

항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津下面)에 속했으며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진하면 직목촌(直木村)지역이었다. 1972년 제작된 광양현지도에 의하면 진하면 진목리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항동마을은 중산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약 355년 전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처음 입촌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며 현재도 밀양박씨가 동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이름 유래는 마을형국이 목처럼 잘록하게 위치한 마을이란 뜻에서 비롯됐다. 

즉 ‘고개 밑’이란 뜻으로 목+마을이 합쳐진 것인데 목+마을이 목말, 목골, 목몰로 변화되었고, 이를 한자로 쓸 때 목을 뜻하는 항(吭)과 골·몰을 뜻하는 동(洞)을 사용하여 항동(吭洞)이라 했다. 

하지만 뒤에 항(吭)자를 다시 비슷한 의미를 가진 항(項)으로 바꾸면서 항동(項洞)이 되었다고 전한다.

■ 은행나무와 공동우물

항동마을은 마을 정면에서 보면 가구 수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마을길을 따라 가다보면 굽이지는 길을 꺾어 안쪽에 들어서야만 집들이 나온다. 

마을회관도 마을 입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대나무 숲길을 향해 걸어야 비로소 보인다.

이 마을에는 마을 주민 전체가 사용하는 공동우물이 있는데 마을회관으로 가기위해 안쪽으로 가다보면 나온다. 

우물은 마을 면적으로 볼 때 마을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바로 위쪽에는 마을의 자랑인 은행나무가 있다. 예전에는 은행나무 암수가 있어 우물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현재는 1그루만 남아있다. 

대신 우물로 가기 전 길 모퉁이에 또 다른 은행나무 1기 있다.

항동마을에는 예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조선시대 수직(壽職 :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官員)과 90세 이상의 서민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철종조에 출생한 박세운, 박철갑과 고종조에 출생한 박은국이 대표적인 예로 모두 90세 이상 장수했다.

또 효자 박준득은 1856년생 항동마을 출신으로 부친에 대한 효행이 지극해 세상사람들로부터 하늘에서 난 효자라고 불리었으며 지금도 그의 효행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칭송되고 있다.

항동마을에서 진목마을로 가는 길가에는 이채한(李埰漢)의사 신도비가 있다. 

이채한은 정희량이 순천에서 난을 일으켜 그 난이 확대해질 때 사위인 상호군 송흠명과 지기인 서명팔과 함께 의거하여 난을 진압했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5위장절충장군(五衛將折衷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하고 사후에 병조참의를 추증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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