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서마을은 예부터 서당이 있어 ‘구서원’이라 불렸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구서다리, 회관준공 공덕비, 우산각, 마을회관, 병풍바위 순이다.
구서마을은 예부터 서당이 있어 ‘구서원’이라 불렸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구서다리, 회관준공 공덕비, 우산각, 마을회관, 병풍바위 순이다.

구서마을은 봉강면사무소를 지나 봉강계곡으로 가는 길가에 자리한 마을로 동으로는 병풍산(屛風山), 서로는 비봉산(飛鳳山), 마을 앞에는 용수보(龍水洑), 마을 가운데는 농암석(籠岩石)이 위치해 있다. 

특히 병풍산에는 큰 바위들이 잇대어 병풍처럼 놓여 있어 마을주민들은 이를 병풍바위라 부른다.

■구서원(具書院)의 유래

구서마을은 본래 광양현 북면(北面) 며내리(㫆內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며내면에 속했고 1872년 광양현 지도에는 며내면 구서리(具書里)지역으로 문헌상 마을이름이 처음 나타났다.

구서마을은 1715년쯤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처음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금녕김씨(金寧金氏)가 처음 입촌해 마을을 이루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실제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마을을 처음에는 둔촌(屯村)이라고 했는데 조선 중기(1675~1720)에는 며내면(㫆內面)에 속해 구석동(九錫洞)이라 불렀다.

그 이후에 예부터 서당이 있었다는 뜻으로 구서(具書)로 마을이름을 고쳤다고 전한다.

즉 구서리는 옛날 이 지역에 서당이 있어서 글을 갖춘 고을이란 뜻으로 ‘구서원(具書院)’, ‘구서골’, 또는 ‘구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현재 마을회관 입구에 마련된 마을 유래비에는 구서마을 이름유래와 마을 정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구서 마을 한 가운데에는 농암석(籠岩石)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농암석에는 구서동(具書洞)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자는 1923년 이 마을 배낙순(裵樂淳)씨가 제서(題書)해 새겼다고 전한다.

■구서다리와 암서와

구서마을 서쪽에 자리한 비봉산 중턱 해발 500m지점에는 자연암굴인 암서와(岩棲窩)가 있다. 이 암서와는 높이10m, 가로15m의 암괴가 절벽을 이룬 밑에 자연히 생긴 것이다. 암굴의 내부 넓이는 10평정도이며, 암굴 안에는 바위틈에서 솟고 있는 샘이 있다. 

이곳은 1849년 현종15년에 솔성재 박정일(率性齋朴禎一)이 후대에 면학을 위해 평생을 수학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성격이 효우(孝友)하며, 모친이 병으로 위독하자 단지주혈했으며, 상을 당하자 예를 다해 상을 치른 후 장형을 어버이 섬기듯 했다고 한다. 그는 중용(中庸)을 즐겨 읽었으며, 세간의 명리와 성색(聲色)을 탐하지 않고 자기수양과 후배양성에 심혈을 경주하면서 많은 선비들의 흠모를 받았다. 

그 후 후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암굴 안에 조그만 거소를 마련했으며 한때 6대손 박기흥(朴己洪)이 이를 관리하면서 음력 4월 15일에는 제향했다고 전한다.

구서마을 앞 구서다리는 빨치산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당한 현장이다. 구서리는 면소재지 인근으로 빨치산이 자주 출몰한 지역인데, 1949년 12월 29일 봉강면 소재지에서 반란군이 야음(夜陰)을 틈타 지서를 습격했고, 이때 주민 9명이 빨치산에 의해 돌과 총에 희생됐다고 한다.

양재생 기자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