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悲秋(비추) 

                                           삼괴당 신종호

        하얀 옥 갈고리에 가는 달 걸려 있고

        서리바람 이슬 국화 뜰 속에 가득한데

        시름에 묻을 곳 없이 흰머리를 심는다.

        月子纖纖白玉鉤    霜風露菊滿庭秋

        월자섬섬백옥구    상풍로국만정추

        天翁不辦埋愁地    盡向寒窓種白頭

        천옹불판매수지    진향한창종백두

가을이 되면 소소함을 느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움츠리는 겨울을 맞이해야 되기 때문이다. 다시 겨울은 폐장(閉藏)이란 한 해의 쉼을 말해준다. 활동하는 시기엔 순간적으로 지나는 계절을 잊지만 한가한 겨울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희끗희끗 길어진 하얀 머리털을 보면 친지와 친구가 더 그리워진다. 시인도 그랬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시름 묻을 곳을 다 마련하지 못한 채이지만 모두 다 타향에서 흰 머리만을 심었다오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타향에서 흰 머리만을 모두 깊이 심었다오(悲秋)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1456~1497)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하얀 옥 갈구리에 가는 달이 걸려 있고 / 서리 바람에 이슬 국화는 가을 뜰에 가득하구나 // 하나님은 시름 묻을 그 곳을 다 마련하지 못한 채이나 / 모두 다 타향에서 흰 머리만을 깊이 심었다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어느 슬픈 가을]로 번역된다. 사람은 어느 순간 많은 시름 속에 묻힌다. 우리나라 날씨를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 했던가, 사람의 운수도 좋은 날도 있고, 그렇지 않는 날도 있기는 하지만, 어느 가을은 몹시 힘들고 슬픈 나날이 되었던가 보다. 흉년이 들어서 일까. 과년한 딸을 결혼 시키지 못해일까. 이러저러한 시름 때문에 머럿털은 희어졌다.

 시인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쓸쓸한 어느 슬픈 가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차가운 어느 가을날 하얀 옥 같은 갈구리의 구름에 실 같은 초승달이 달이 걸려 있고 소소한 서리 바람에 이슬 국화 가을 뜰에 가득하는 시상을 떠올렸다. 그 때의 심정에 따라서 시상은 달라지겠지만 가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을 찢어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화자는 이런 시름 덩이를 하나님만은 알고 다독여 주지나 않을까 살며시 의지해 본다. 시름이 묻어 있는 곳을 하나님은 미처 마련하지 못한 채, 사람들 모두 다 타향에서 흰 머리만 심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흰머리가 났다면 시가 되지 않지만, 흰 머리를 심었다면 시가 됨을 잘 알고 있어 보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갈구리에 걸린 달이 국화 뜰에 가득하네, 시름 묻은 곳 하나 없이 타향에서 흰 머리만’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1456~1497)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신숙주의 손자이고 신주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명회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성균 진사시에 1480년 식년문과에 다시 장원하여 그 해 감찰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천추사 홍귀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한자와 어구】

月子: 달. 여기서는 가는 달을 뜻함. 纖纖: 가늘게. 작게. 白玉鉤: 백옥 갈구리. 霜風: 서리와 바람. 露菊: 이슬 맞은 국화. 滿庭秋: 가을 뜰에 가득하다. // 天翁: 하느님. 不辦: 힘쓰지 못하다. 판단하지 못하다. 埋愁地: 가을 뜰에 묻다. 盡向: 다 향하다. 寒窓: 차가운 창. 곧 타향. 種白頭: 흰 머리를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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