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 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 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以烏几遣容齋(이오궤견용재) 

                                           읍취헌 박은

 

        퇴락한 서재이나 쓸데없는 물건 없고

        평생에 수많은 책 성현님들 모습에서

        저녁에 소슬 바람에 새소리가 여유롭네.

        容齋寥落無長物    唯有平生萬卷書

        용재요락무장물    유유평생만권서

        獨倚烏皮對聖賢    晩風晴日鳥聲餘

        독의오피대성현    만풍청일조성여

오궤(烏几)는 검은 양가죽으로 꾸민 안석을 뜻한다. 옛날 사대부들이 안방에 두고 앉아 있을 때 몸을 기대는 데 쓰는 안석(案席)의 한 종류다. 안석 또한 앉아서 몸을 뒤로 기대는 데 사용하는 방석의 일종이었다. 모두 방에서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도구다. 선현들은 최소한 방안에 있을 때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도구를 사용했던 모양이다. 조용한 서재는 퇴락했으나 쓸데없는 물건은 없고 홀로 오피에 기대어 서서 성현을 대하네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저녁 바람 부는 맑은 날씨에 새소리 여유롭네(以烏几遣容齋)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읍취헌(邑翠軒) 박은(朴誾:1479~150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조용한 서재는 퇴락했으나 쓸데없는 물건은 없고 / 오직 평생동안 모은 만 권의 책만이 있다네 // 홀로 오피에 기대어 서서 성현을 대하면 / 저녁 바람 부는 맑은 날씨에 새 소리만이 여유롭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까마귀 궤를 용제께 보내다]로 번역된다. 시제의 용재(容齋)는 이행(李荇:1478∼1534)으로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냈지만 시골 노인처럼 평범한 한복을 즐겨 입고 다녔던 것으로 알려진다. 잘 아는 친지 사이엔 작은 선물들이 오고 갔다. 작은 정성이자 마음의 표시리라. 시인은 친지 용재에게 검은 빛깔이 나는 책상인 오궤(烏几)를 보냈던 모양이다.

 어쩌면 선물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한다. 시인은 선물을 보내고 난 후 용재의 조용한 서재는 비록 퇴락했으나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고, 오직 평생 읽고 모아 둔 만 권의 책만이 있다는 사상을 떠올린다. 용재 서재에 대한 시상이지만, 선비답게 책이 많다는 뜻을 내포한다. 선비의 재산은 책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선경의 밑그림을 잘 그려놓았다.

 화자의 시상은 보내드린 오궤(烏几)에 앉아 책을 읽을 용재를 보았거나 상상을 했겠다. 그래서 홀로 오피(烏皮)에 기대어 성현을 대하고 있으면, 저녁 바람 부는 맑은 날씨에 새 소리까지도 여유롭다고 했을 것이다. 성현을 대한다는 것은 바로 성현의 주옥과 같은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조용한 서재 물건 없고 만 권 책만 쌓여있네, 오피에 기대어 선현 대하니 새 소리만 여유롭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읍취헌(邑翠軒) 박은(朴誾:1479~1504)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4세에 독서할 줄 알았으며, 8세에 대의를 알았다고 전한다. 1493년(성종24) 15세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대제학이었던 신용개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1495년(연산군1) 17세 진사가 되었다.

【한자와 어구】

烏几: 검은 양가죽 안궤. 容齋: 이행의 호. 寥落: 쓸쓸하게 떨어짐. 無長物: 쓸데없는 물건은 없다. 唯: 오직. 平生: 평생. 萬卷書: 만권 책이 있다. // 獨倚: 홀로 기대다. 烏皮: 오피궤(烏皮几), 오궤(烏几)와 같은 뜻. 對聖賢: 성현을 대하다. 晩風: 저녁 바람이 불다. 晴日: 맑은 날씨. 鳥聲餘: 새소리가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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