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마을은 쌍두마을 뒷편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잣골’이라고도 불렸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마을버스정류장, 당산나무,마을노인정, 우산각, 우물 순이다.
백동마을은 쌍두마을 뒷편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잣골’이라고도 불렸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마을버스정류장, 당산나무,마을노인정, 우산각, 우물 순이다.

백동마을은 사라실 쌍두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샘골’과 ‘현사골’ 중간에 위치한다. 행정리상 쌍백마을에 포함되고 있는데 쌍백은 쌍두마을과 백동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마을유래 및 주요시설

백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사라곡리(沙羅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사라곡면(沙羅谷面)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사곡면(沙谷面) 백동촌(栢洞村)으로 문헌상 처음 기록되어 전한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사곡면(紗谷面)에 속해 백동리(栢洞里)라 했다.

행정구역 개편 후인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광양면 죽림리(竹林里)에 속했다.

백동마을은 임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이후 남원양씨가 처음 입촌해 7대에 걸쳐 살았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백(栢)자 대신에 ‘비단 백(帛)’자를 써서 백동(帛洞)이라 했으며, 죽림과 사곡을 합해 통칭하기를 사라실(沙羅室)이라 했다고 전한다. 

이는 풍수지리상의 옥녀봉(玉女峰)의 옥녀가 용강리 베틀머리 기두(機頭)의 베틀로 비단을 짤 때 이 지역이 작업실에 해당된다하여 부른 이름이라고 전한다. 

한편 백동을 ‘잣골’이라고도 하는데 ‘잣’은 옛날 음운학상 ‘산’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백동(栢洞)은 산골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백동(帛洞)이라고 불렀을 때는 마을이 매우 부자였으나, 백동(栢洞)으로 바뀐 후부터 전과 같이 못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백동마을 한 가운데는 우물 이 하나 있다. 

이 우물은 극심한 가뭄이 들어도 샘물이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기로 예부터 유명하다. 

정사각형 우물 정(井)자 형국으로 우물 전체를 돌로 만들었는데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약 25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물 바로 앞에는 이 마을의 정자나무인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곳은 옛날 사당(射當)터 였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정자나무 사이에 우산각이 마련이 됐다.

■마로산성을 지나는 옛길

백동마을은 국도2호선이 확장되기 전에는 이곳 마을에서 읍내로 가려면 곧바로 마로산성을 넘어 다녔다고 한다.

현재 변전소가 위치한 골짜기인 깔밭골로 나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 마로산성 북쪽에서 다시 산밑으로 내려가 와룡저수지를 지나 와룡·관동마을을 따라 내려가 광양읍내로 오갔다고 전한다.

 백동·임기·쌍두마을에는 조선시대 군정(軍丁)을 면제받은 5성씨, 즉 영천이씨, 진주강씨, 전주이씨, 영광정씨, 광산정씨가 살았던 양반촌이 되어 한때는 설날이 되면 관아에서 아전들이 이곳 옛길을 통해 마로산성을 넘어 5성씨들에게 세배를 하러 왔던 길이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마을주변에 옛 양반들이 살았던 집터에서 기와편들이 출토된다고 전한다.

백동마을에는 올곧은 선비 강윤수(姜倫秀)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온다. 

문헌상 근거자료를 확인할 수 없어 출신 인물란에는 기록하지 못하고 예부터 전해오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기술하고 있다. 

강윤수(姜倫秀)는 1881년 백동(죽림리 637)에서 태어났는데 자는 도홍(道鴻), 호는 훤춘당(煊春堂)이며, 1920년 부근 마을인 신기(새터)마을에 훤춘당(煊春堂)이란 서재를 건립하고 후학들을 양성한 한학자로 왜정시대 창씨개명과 단발령에 강력히 반발한 인물이다. 수년동안 일본 경찰의 회유와 고초를 당하면서도 끝끝내 거부하자 1940년 정월에 일본 경찰이 강제로 연행해 모진 고문을 하면서 강제로 상투를 자르자 단식으로 항거하다 동년 2월 5일 운명했다고 전한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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