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마을은 옛날 마을 앞 하천가에 큰 아동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오동쟁이라 불리우다 오동이 됐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마을회관, 마을 서북쪽 우산각, 정자나무와 정자, 마을 뒤 저수지 순이다.
오동마을은 옛날 마을 앞 하천가에 큰 아동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오동쟁이라 불리우다 오동이 됐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마을회관, 마을 서북쪽 우산각, 정자나무와 정자, 마을 뒤 저수지 순이다.

오동마을은 옥곡면 대죽리 5개마을 중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대리마을과 죽양마을 사이에 위치한다. 마을 뒤편으로 묵방마을로 향하는 길에 저수지가 있으며, 마을 북쪽으로 4km거리에 국사봉이 있다. 

■오동(梧洞)의 유래

오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곡면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대리촌(大里村)지역으로 추정된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옥곡면 오동리(梧桐里)라 했다. 1914년 행정구경 통폐합으로 죽치리・대리・백양리와 함께 병합하면서 대죽리(大里里)에 속했다.

오동(梧洞)마을은 1683년경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처음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며 현재도 광산김씨가 제일 많이 살고 있다. 

마을은 옛날 마을 앞 하천가에 큰 오동(梧桐)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홍수가 날 때 냇물을 건너는데 교량 역할을 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오동정(梧桐亭)’, ‘오동쟁이’라 불러오다가 여기에 연유해 오동(梧桐)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됐다. 

마을이름은 처음에는 오동(梧桐)이라는 한자를 사용했지만 30여년 전 오동(梧桐)의 동(桐)을 고을 동(洞)으로 바꾸면서 현재는 오동(梧洞)이 됐다.

현재 마을 앞 하천가, 옥곡면 대죽리 1372번지에 마을 당산나무가 있는데 느티나무 2그루와 푸조나무 1그루며 이 가운데 느티나무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됐다. 지정 당시 수령이 300년이었으며 현재 나무 아래에 정자(亭子)가 세워져 있어 마을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용곡사지(龍谷寺址)

오동마을에는 용곡사지석탑재(龍谷寺址石塔材)가 있다. 이 탑재는 마을 건너편 탑골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용곡사지’라고 구전되어 온 곳으로 현재 주변은 밭과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다. 

탑재는 밭 가운데 옥개석 1점만  남아있을 뿐 그 밖의 다른 부재는 없고 주변에 와편과 토기・자기편들이 산재되어 있다. 옥개석은 자연석 위에 올려져 있는데 낙수면의 경사는 급한 편이 아니고 우동마루가 뚜렷하며 낙수면의 합각선은 예리하다. 

전각의 반전은 약하고 층급받침은 2단으로 많이 줄어들었으며 하면에 지름 5㎝, 깊이 1.5㎝의 성혈 2개가 있다. 이 옥개석의 규모는 가로 61㎝, 세로 62㎝, 높이 21㎝이다.

용곡사는 사서나 읍지에는 기록되어 전하지 않으나 구전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기지진압(基地鎭壓)을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사찰의 귀중한 유물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인들이 가져가 버렸고 석탑은 8.15광복 이후까지 있었으나 언젠가 파괴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한편 마을 서북쪽에 선바구(큰바구)가 있는데 마을주민들은 이 선바구가 마을을 지키는 구실을 한다고 믿고 있다. 딱밭골 북쪽의 탑골에는 탑이 있었으나 파손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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