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흥 남 (前 한려대 교수, 문학평론가)
전 흥 남 (前 한려대 교수, 문학평론가)

‘남도’라는 말을 들으면 고향의 푸근함이 느껴져 정겹다. ‘남도작가’라는 말도 떠올려 본다.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필자는 ‘남도작가’라는 말을 글에서 종종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남도작가’라는 말에 대해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어 스스로 제한된 의미로 사용 한다. ‘남도작가’라는 용어는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정제되고 합의된 용어는 아니다. 더욱이 ‘남도’라는 특정지역을 염두에 두거나 지역성을 배타적으로 적용한 개념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남도작가’라는 범주에는 ‘남도’에서 출생해서 어린 시절 혹은 학창시절을 남도에서 보낸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어린 시절의 ‘남도’ 체험의 공유는 작가들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여순 10 ・19’  및 광주 ‘5・18’의 체험 그리고 민주화시대를 몸소 거쳐 온 세대로서 공간성(원체험)이 갖는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접근할 때 글쓴이는 소설가로는 김승옥, 조정래, 서정인,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문순태 등을 ‘남도작가’의 범주에 포함시키면 어느 정도 부합한다. 연령도 대체로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 초반으로 생존해 계실 경우 80세 중반을 넘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작고한 문인도 2명 정도 포함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남도작가’의 문학자산이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들의 경우 고향을 떠나서 창작활동을 하더라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귀향의 도정 및 귀향 모티프를 통해 고향의식이 농밀하게 드러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첨단산업화 시대 탈고향이 보편적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란 대체로 끊임없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인간에게는 장소애(Topophillia)가 있으며, 이는 작가 혹은 독자에게 상상력의 풍요로움을 제공한다. 특히 작가에게 있어 유년기의 체험 및 개인사적인 경험은 역사성과도 맞물려 있어 창작과정에서의 변용이나 형상화 과정을 통해 그 의미의 지평을 확대해 준다. 

작가 역시 진공(vacuum)상태에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했거나 혹은 여러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나아가 이런 점들이 작품에 은연중 배어 있기 마련이다. 특히 ‘남도 출신’ 작가에게 있어 고향은 역사의 아픔・상처를 확인하고 치유하는 방식, 인간다운 삶의 법도를 발견하기, 또는 합리적 사회의 비인간성 폭로하기, 건강한 생명력의 충전방식 등을 제시하고 매개하는 데 유효한 측면이 있다. 작가 역시 고향에서의 여러 체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에 반영시킴으로써 작품의 핍진성을 강화시켜 왔다. 

소설의 경우를 적용해 보면, 소설의 공간묘사는 소설가가 세계에 대하여 갖는 관심의 정도와 그 질을 나타내 보인다. 즉 작가는 인간이 그를 에워싼 세계와 맺게 되는 기본적인 관계를 특정 공간에 대한 반응을 통해 표현한다. 이때 인간은 한 공간으로부터 도피하기도 하고, 그 공간으로 숨어들기도 하며, 혹은 그 공간을 통해서 자기인식에 도달하기도 한다. 

고향은 작가의 삶과 지적・정서적 요인을 형성하는 본질인 것처럼 시민들 역시 고향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재충전 받으려 한다. 그만큼 고향이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가장 근원적으로 접근해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21세기 첨단산업화 시대를 운위(云謂)하는 작금의 상황은 탈고향의 추세라고는 하지만 고향의 정서가 농밀하게 반영된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충전과 힐링의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 남도의 근현대 문학을 주제로 6월 한 달 동안 중마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소회이다. 

‘광양의 작가’ 이균영을 시발로 해서 문순태, 김승옥, 이청준 및 여순 10・19 관련 작품들을 접해도 보고 동시에 ‘남도작가’의 삶의 역정(歷程)도 살펴보는 만큼 시민(혹은 독자)들의 관심도 기대해 본다.

chn0075@hanmail.net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