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양마을은 구석기 유물은 간직한 마을로 본래 터는 텃골인 죽치에서 시작됐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도로개설 기념비, 마을 노인정, 마을회관, 마을정자 순이다.
죽양마을은 구석기 유물은 간직한 마을로 본래 터는 텃골인 죽치에서 시작됐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도로개설 기념비, 마을 노인정, 마을회관, 마을정자 순이다.

■죽치에서 죽양으로

죽양마을은 옥곡면 대죽리 마을의 하나로 오동마을을 지나 백양마을 가기 전 좌측에 위치한다. 마을 남쪽에 나무정골이라는 남곡이 있으며 서북쪽에는 옥룡면 율천리로 가는 대티재가 있다.

마을 인근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주먹도끼가 출토된 바 있어 선사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마을역사는 알 수 없고 문헌기록을 근거해 마을연혁을 살피면 1600년경에는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옥곡면(玉谷面)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옥곡면 죽치촌(竹峙村)이라 했고 1872년에 제작된 광양현지도에는 죽치리(竹峙里)라 표기돼 있다.

본래 마을 형성지인 텃골(죽치마을 옛터)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1490년경으로 김해허씨(金海許氏)가 입촌하면서다. 

이후 양씨(楊氏)가 1820년경에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기 시작해 마을이 형성됐으며 마을위치가 명당이라 하여 텃골에서 이주했다고 전한다. 

현재는 전주이씨(全州李氏)가 가장 많이 살고 있으며 마을 위쪽으로 남정마을이 위치한다.

본래 마을 터인 텃골을 죽치(竹峙)라고 한 이유는 이 지역에 대나무(竹)가 많아 즉 ‘큰재 아래에 대가 많은 고장’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현재의 죽양마을 주변에도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죽치·대치·대티라고도 부르는 옛말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산고개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옛말 산+고개를 합쳐진 닫고개에서 댓고개, 대고개로 변화되어 왔는데 이를 한자로 쓸 때 ‘대’를 대나무(竹)로 보고 죽치(竹峙)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 유물 산포지

죽양마을은 한때 죽치(竹峙)·남정(南亭)·백양(白楊)마을을 합해 죽치(竹峙)와 백양(白楊)에서 한 글자씩 따서 죽양(竹楊)이라 했는데 백양(白楊)마을이 별도로 독립한 이후에도 죽양(竹楊)이라 부르고 있다.

죽양마을은 마을 입구에서 수평천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위쪽 계곡 양편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개의 언덕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됐다. 

유물산포지는 백양마을을 포함해 약 6천여평에 이르며 현재 유적지는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유물인 석기는 돌로 쌓은 논둑이나 논 가장자리에서 수습됐는데, 석기로는 매우 고운 입자의 석양암 자갈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석기는 몸돌(주먹도끼)로서 구석기시대 사냥도구로 쓰였다.

마을입구 정자나무가 있는 자리에서 우측 안길로 조금 올라가면 마을회관이 나오고 그 옆에 마을 도로개설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85년 주민 자력으로 마을진입로 800m와 마을안길을 포장해 당시 광양군에서 도로포장이 가장 우수한 마을로 평가받으며 주민들의 협동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기념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한 것이다.

또 이 마을은 장수마을로 유명하다. 

한때 마을 60여호 중 80세 이상이 21명, 75세 이상이 27명이나 돼 마을 입구 표지석에 ‘국사봉 정기받아 장수마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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