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마을은 옛날 이 마을에 잣나무가 많아 ‘잣밭골’로 불리던 마을이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우산각, 정자나무, 마을회관, 정토천, 마을표지석 순이다.
백암마을은 옛날 이 마을에 잣나무가 많아 ‘잣밭골’로 불리던 마을이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마을전경, 우산각, 정자나무, 마을회관, 정토천, 마을표지석 순이다.

백암마을은 옥곡면 묵백리에 속한 마을로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옥곡중학교 앞을 지나는 정토천이 이 마을에서 시작되며, 마을 뒤쪽 산고개를 통하면 진상면 웅동마을이 나온다.

■잣밭골의 유래

백암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곡면 지역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삼존동(三尊洞)지역이었다.

백암마을의 형성은 1591년경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라고 전한다. 

마을이름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잣나무(栢)가 많이 자라고 있어 ‘잣밭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백암(栢岩)의 ‘백(栢)’은 잣나무를 뜻하며 ‘암(岩)’은 마을 앞 계곡에 바위가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잣밭골’은 마을회관 바로 우측 계곡을 지칭하는 말로 이곳 계곡을 따라 상부 깊숙한 곳에 옛날 ‘백암사(栢岩寺)’란 절이 있었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됐다고 전한다. 옛말의 변천과정을 살피면 ‘잣밭골’의 본래 뜻은 ‘산골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묵백리(墨栢里)의 지명유래는 1914년에 당시 백암리(栢岩里)・부두리(浮斗里)・묵방리(墨坊里)・사동리(獅洞里)・삼존리(三尊里)를 통폐합할 때 묵방리와 백암리의 첫 글자를 따서 묵백리(墨栢里)라 했다.

백암마을회관 우측 산 계곡에는 옛날 큰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곳 바위에 ‘백학동(白鶴洞)’이란 글씨가 남아 있었다. 이곳 마을이 설촌되기 전에 백암사(栢岩寺) 스님이 새긴 것이라 전하는데 ‘백운산의 백학동(白鶴洞), 지리산의 청학동(靑鶴洞)은 난리에 대비한 피난처’라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만 해도 이곳 ‘백학동’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하는데 2001년 홍수로 인해 바위가 훼손되어 ‘백학동(白鶴洞)’이란 글씨는 현재 없어졌다.

■의병들의 군사훈련 기지터

백암마을은 마을회관을 기준삼아 아래쪽에 감남똠과 동뜸이 있고 마을회관 위쪽으로는 깃대봉이 있다.

감남똠은 마을회관 아래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옛날 감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뜸은 백암마을 아래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깃대봉은 마을 가장 뒤쪽에 위치해 삼밭골 위쪽의 산봉우리로 일제강점기 시대 이곳에서 깃대를 꽂아 측량기점으로 삼았으며 재를 넘으면 진상면이 나온다.

백암마을회관 뒤에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200여 년 된 정자나무가 있으며 그 옆에는 마을주민을 위한 우산각이 마련돼 있다.

특히 백암마을 뒤 약 1.2km에 위치한 산 정상 바로 아래쪽의 널찍한 장소에는 구한말 의병들의 군사훈련 기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상면 웅동으로 연결되는 ‘바람재’ 바로 안쪽 지역에 해당되는데, 구한말 이곳에서 우리 고장 의병들이 군사훈련을 했던 지역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당시 이곳 ‘바람재’ 정상에서 진상 ‘생쇠골’ 의병기지와 깃발(옷등으로 표시)표시로 적의 동정을 서로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 부대는 진월 망덕에서 일본인들을 습격하는 전투를 했던 황병학 의병부대라고 한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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