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화재는 원래 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난다. 광양이 빚어낸 유일한 국보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국립 광주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광양지역사회는 광양의 국보인 쌍사자석등을 원래의 자리로 가져오기 위한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는 쌍사자석등.
모든 문화재는 원래 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난다. 광양이 빚어낸 유일한 국보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국립 광주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광양지역사회는 광양의 국보인 쌍사자석등을 원래의 자리로 가져오기 위한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는 쌍사자석등.

지난 2021년 12월 16일, 국보 제103호 광양중흥산성 쌍사자석등 환수위원회 발대식이 광양시청 대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일제강점기에 도둑맞은 광양의 국보를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시민운동이 12년 만에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난관이 많다. 

이전 장소와 관리 등을 둘러싸고 소유권을 가진 문화재청의 승인 등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짚어본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만난 쌍사자석등

본지의 ‘지명유래와 함께 마을 둘러보기’라는 기획연재를 위해 중흥사에 올랐다. 

중흥사는 대웅전을 비롯해 산신각, 요사채가 위치한다. 

그리고 대웅전 좌측부근에는 석축을 쌓아 평지를 만든 곳에 두 개의 돌탑이 한눈에 보이는데, 쌍사자석등과 중흥산성 삼층석탑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쌍사자석등은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다. 

광양 유일한 국보의 반출이라는 아픈 역사를 안고 모형으로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광양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광양지역 출토 문화재 중 유일한 국보이지만 현재 국립광주박물관 역사문화실 2에 전시되어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모두 6개의 조각으로 구성됐다. 

지대석, 하대석, 간주석과 상대석, 화사석, 옥개석, 보주로 이루어졌다. 네모난 받침돌(지대석) 위에 8각으로 이뤄진 꽃부리가 밑으로 조심스럽게 아래로 드리운 연꽃이 장식된 하대석이 놓였고, 그 위에 두 마리 사자와 연결된 꽃부리가 위로 피어나는 연꽃 받침을 하고 있다. 

그 위는 홑꽃 겹잎 8잎의 밑으로 드리워진 연꽃이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지대석은 다른 돌이고 하대하석과 복련하대석은 모두 한 돌로 이뤄졌다. 간주석의 쌍사자와 앙련 받침돌, 앙련 상대석은 모두 길쭉한 돌 하나를 통째로 조각해 구조적으로 안정성까지 높였다. 

쌍사자 받침석은 밑이 좁아지는 원반형으로 주변을 돌아가며 홑꽃 겹잎 16잎의 벙그러진 연꽃을 조각해 꾸몄다. 

연꽃은 9세기 특징 중 하나인 왼쪽으로 살짝 비스듬하게 기운 형태로 마치 사자를 회전목마 태우는 것 같은 회전 운동감을 반영하는 재치 넘치는 조형이다.

사자상은 암수 한쌍이 서로 가슴을 맞댄 채 뒷발은 연화 받침석을 딛고 앞발과 입으로 상대석과 화사석을 애써 받드는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벌린 모습이다.

 꼬리는 엉덩이를 지나 허리춤까지 닿을 정도로 바짝 치켜들었다. 

이렇듯 암수의 입모양과 갈기 유무, 치켜세운 꼬리에서 완벽한 대칭보다는 잔잔한 비대칭의 여유가 느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비교적 조성 시기가 명확하고 고대 광양 지역의 역사성과 시대성을 포함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반출과 수난의 역사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이 이처럼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지만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30년 8월 무렵 옥룡보통학교 건립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된 후원회가 중흥산성의 3층석탑과 석등을 팔고자 했다. 

그리고 골동품상은 이 석등을 대구의 부호인 이치다 지로에게 팔기로 전달했다. 

그러면서 보통학교 후원회에서 석등의 가치를 알아본 결과 자신들의 예상가보다 7~8배 많아 오히려 놀라게 됐고 결국 군청 당국과 이 일을 상의하면서 자신들의 행위가 법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알고 매각을 포기하게 됐다.

이후 대구의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와 부산 골동품상의 사주로 불법자들이 이 석등을 분해해 옥룡면사무소 앞으로 옮기다 주민들에 발각되어 석등 반출은 실패하고, 면사무소에 보관하게 됐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오가와 게이키치를 파견해 석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석등은 1931년 5월 조선 보물 제183호로 지정됐다. 같은 해 12월 오가와 게이키치의 정밀 조사를 거친 후 1937년 1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 앞뜰에 설치했다. 

또 같은해 11월에는 경복궁 자경전 앞뜰로 옮겨졌다가 1959년에는 경무대 정원으로, 1960년부터는 덕수궁 국립박물관 중앙진열실에서 전시됐다. 

1972년에는 경복궁 국립박물관 불교조각실로 옮겨 전시되다 19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정원으로 옮겼으며, 1990년 8월, 호남지역의 반출문화재 환수운동 결과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전돼 지금까지 상설전시하고 있다.

지난 1992년과 2009년 광양시민들은 2번에 걸쳐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반환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무산된 바 있다. 

특히 광양군 시절이던 1992년에는 당시 광양문화원 주도로 광양군민 2,210명의 연서 등 범군민적 운동을 펼치며 문화재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문화재 관리부처는 석등 보존 상태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안전한 환경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환을 거절했다.

■문화재 외지반출사례와 반환

이처럼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공권력에 의해 외지로 반출된 문화재가 원래의 위치로 반환된 사례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 없다. 

다만 지역 국립박물관으로까지 이동된 네가지 사례가 있다. 

1990년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전한 국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과 1994년 국립 대구박물관으로 이전한 보물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2017년 5월, 국립나주박물관으로 이전한 보물 ‘나주 서성문 안 석등’, 2018년 11월 국립진주박물관으로 이전한 보물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에는 문화재의 안전을 이유로 원위치 이전을 극구 반대하던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에서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강원도 원주시민들의 강력한 주장이 큰 방향을 불러일으키며 ‘지광국사현묘탑’이 원소재지인 원주 법천사지로 귀환 준비를 마쳤다.

지광국사탑은 1085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에 세워졌던 고려 시대 승려 지광국사 해린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해 일보 오사카로 무단 반출하는 등 10여차례 이건되고, 6.25 전쟁때는 경복궁 뜰에 있던 탑이 폭격을 당하는 등 역사적 고난과 아픔을 겪었다.

이후 1957년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석재가 아닌 모르타르를 덧대어 다수의 균열과 손상이 발생했고, 특히 옥개석과 상륜부는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추가 훼손 우려까지 제기됐다. 

환수 위한 시민대책위 구성했지만, 문화재청 입장 변화가 관건

이에 2015년 문화재위원회는 심의를 거쳐 탑을 전면 해체해 보존 처리하기로 했고, 2016년부터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해왔다. 

결국 지광국사탑은 110년만에 원주로 귀향할 것으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정확한 장소는 아직 확정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과제는

지난 2021년 3월 광양읍에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을 계기로 지역에서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반환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도립미술관이 개관 했기때문에 석등을 보존할 수 있는 광양시의 역량이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국보란 국가재산으로 관리하는 유물이어서 이관 대상이 아니기에 원칙적으로 반환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다행히 지광국사탑이 원주로 귀환할 준비를 마치고 있는 상태여서 이를 계기로 광양에서도 민관이 뭉쳐 반환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이에 중흥산성 삼층석탑 주변 발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흥산성 삼층석탑 주변 발굴을 통해 전체적인 가람배치와 석등과 삼층석탑이 있었던 원래의 위치를 확인하고 원래의 사찰명도 밝힐 수 있다는 이유다.

또 이에 걸맞는 시립박물관 건립이 필요하는 주장도 제기된다. 

지금까지 광양 관내의 유적 발굴결과 출토된 유물을 지역에서 보관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의 박물관 또는 문화재 관련 기관으로 귀속된 바 있는데, 시립박물관 건립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환수하고, 앞으로 광양에서 발굴된 유물을 광양에서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아직까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쌍사자석등이 더 이상 유랑하지 않고 원래의 자리로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양재생 기자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