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재마을은 군장과 재동 두개의 마을이 합쳐진 마을로 가야산 인근 골약동과 옥곡면 경계에 위치한다. 사진은 위에서 부터 군장마을 전경, 마을정자, 효열부 보성선씨비, 마을회관, 재동마을 전경, 군장정 표지석 순이다.
군재마을은 군장과 재동 두개의 마을이 합쳐진 마을로 가야산 인근 골약동과 옥곡면 경계에 위치한다. 사진은 위에서 부터 군장마을 전경, 마을정자, 효열부 보성선씨비, 마을회관, 재동마을 전경, 군장정 표지석 순이다.

군재마을은 골약동과 옥곡면 경계에 있는 마을로 중군터널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황교차로 우측의 정산마을에서 옥곡면 오류마을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군재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엔 재동마을이 오른쪽에는 군장마을이 나온다. 군장과 재동 두 개의 마을을 합쳐 군재라 한다.

■ 군장(軍裝)과 재동(才洞) 유래

군재마을은 고려 또는 그 이전에 아마대부곡(阿磨代部曲)지역에 속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마을연혁은 알 수 없고, 1600년경 광양현 동면(東面) 골약리(骨若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골약면에 속했다.

군재(軍才)는 골약동 중군리 내 자연마을인 군장(軍裝)과 재동(才洞) 두 마을로 이뤄졌는데 각 마을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군재(軍才)라 이름하고 있다.

군장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밀양박씨가 피난생활을 하기 위해 이곳에서 토굴 생활을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 군대가 왜군을 치기 위해 이곳 토굴에서 매복을 했다 전하고 있으며 그 의미를 따서 군장(軍裝)이라 했다. 

일설에는 가야산(伽倻山)에 있는 대장군의 묘에 연유해 지은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재동(才洞)마을은 임진왜란 때 굴속에 매복해 있는 군대를 다시 집합시킬 때 징을 쳤다해서 ‘쟁골’이라 했는데 이를 한문식 표기로 음차하면서 재동(才洞)이라 했다. 마을 주민들은 ‘재앙골’이라고도 부르는데 풍수지리상 마을형국이 뒷산은 쟁(징)에 해당하고, 마을 앞산은 ‘징채’에 해당된다고 한다.

군장과 재동마을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마당재’라고 부르는데 마당처럼 넓고 평평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 아래에 군장과 재동, 옥곡면 오류마을로 나뉘는 갈림길이 있다.

■ 군사주둔지

군재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군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마터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있고 광양에서 표고(標高)가 가장 높아 골약운봉(骨若雲峰)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위치상의 연유로 군인들이 주둔하기에 알맞아 옛 광양고을 내·외면(內外面)의 중심적 군사주둔지가 되어 내면(內面)을 맡는 군대는 골약면 중양(中陽)마을에서, 외면(外面)을 맡는 군대는 옥곡면 장동(莊洞)마을에 집결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는 거대한 봉분(封憤)의 장군묘(將軍墓)가 있었는데 1950년대에 도굴되고 말았다.

이 마을 가야산 8부 능선에는 사람모양의 석조물이 발견되었는데 표면에 중국연호와 ‘월영당(月影堂)’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이 석조물은 오래전에 골동품 수집가에 팔렸으며 지금은 묘의 기단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만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석조물의 출토지 부근에서 청자 파편이 다수 발견됐으며 근처에는 우수한 칠에 이용되는 진흙이 분포되어 있다.

군재마을회관은 비교적 규모가 더 큰 군장마을에 위치하며, 마을회관 옆에는 효열부 보성선씨비가 마련돼 있다. 효열비의 주인공인 선덕업(宣德業)은 28세에 남편을 여의고 수절했지만 품행이 바르고 점잖아 마을주민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해 효열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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