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왕명출납과 관계된 기록을 남겼는데, 그것이 승정원일기다. 임금의 행적에 관한 글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시시콜콜한 일들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태종(이방원)은 어느 날 사냥하는 도중에 말에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말이 움직이는 상태에서 떨어졌는지 아니면 방심하다 서 있는 말에서 떨어졌는지 그것까지 따질 계제는 아니다. 말에서 떨어진 뒤 태종의 반응이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말에서 떨어진 뒤 일성이 “이 사실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측근들에게 입단속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사냥을 나가곤 하는데, 이는 일국의 왕으로서 문무를 겸해야 하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앉아서 업무를 많이 보니 상대적으로 운동량이 부족해서 건강을 챙기는 일환으로 사냥을 가끔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궁밖으로 나가다 보니 때론 신변의 위험도 있어 무술에 능한 호위병들을 대동하고 암암리에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사냥 도중 실수로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당시 신하들에게도 체면이 구겨지는 점도 있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후세에 알려지는 걸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대목이다.   

태종은 어떤 인물인가. 고려말  충신 정몽주를 주살하고 ‘왕자의 난’을 통해 혈육을 죽이면서 왕위에 오를 정도로 권력욕이 대단했던 인물이 아니던가. 한편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도록 기반을 닦은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는 냉혹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뒤따르고 있다. 

그런데 사냥 도중에 말에서 떨어진 사실을 후손들이 알면 창피할 것을 우려했다고? 어찌보면 사소한 일이고 이런 사실의 진위도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승정원에 기록되면 후세에도 전해질 터이고, 태종이 정말로 후세의 평가를 의식한 왕이었다면 재위기간이 궁금해진다. 

적어도 후세의 평가를 의식했다면 나름의 역사의식을 갖춘 군주라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암튼 재위기간 엉망(?)은 아니었을 것으로 헤아려 본다. 태종의 공과를 여기서 논할 자리는 아니지만, 태종은 왕권을 확립해서 훗날 세종이 태평성대의 선정을 펼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역사’ 하면 대체로 우리는 ‘진실’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만큼 역사는 진실에 입각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이다. 설령 부끄러운 역사도 그러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후세에 깨우침을 줌으로써 경계를 삼게 하는 점도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그래서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성립한다. 

물론 역사적 사실도 고정불변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새로운 사실이 훗날에 밝혀져 그동안 왜곡되거나 은폐된 사실이 실체적 진실에 입각해 새롭게 밝혀지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21세기 첨단사회에서 불순한 의도로 역사를 조작하거나 왜곡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한 시도나 유혹에 빠지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알다시피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역사가(E.H.carr)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역사는 염연한 현재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삶과도 조응하기 마련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정치권은 철 지난 역사논쟁(혹은 이념논쟁)으로 민생은 뒷전인 세태를 보고 있자니 시민들이 집단 지성을 발휘해서 위정자들에게 경고장을 날려야 하는데 역사에 대한 관심 나아가 건전한 역사의식만큼 효율적인 무기(?)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제발 위정자들이 후세를 의식하며 민생을 돌보고 동시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챙기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권력으로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시도해서 성공한 정권은 없었으며, 훗날 소모적인 정쟁으로 기록될 것이 자명한 역사의 교훈도 되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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