縱筆(종필) 

                                               고봉 기대승

        소나무에 물결치고 흰 구름 가득하네

        산 사람이 캄캄한 밤 혼자서 걷노라니

        개울물 옥구슬 소리 구르듯이 흐르네.

        淸風動萬松    白雲滿幽谷

        청풍동만송    백운만유곡

        山人獨夜步    溪水鳴寒玉

        산인독야보    계수명한옥

깊은 산중은 아니라도 좋다. 모든 자연이 맑은 공기를 생성해 주고, 새소리 바람소리까지도 맑은 공기를 준다. 시청각이라 했다. 대자연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보는 것이 자연이고 듣는 것이 자연의 소리다. 흐르는 물소리, 돌 구르는 소리,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풍만하게 만든다. 시인도 그랬던 모양이다. 맑은 바람에 소나무들은 물결을 치고, 흰 구름은 그윽한 골짜기에 가득하구나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개울물은 찬 옥구슬 구르듯이 소리 내며 흐른다(縱筆)로 번역해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맑은 바람에 소나무들은 물결을 치고 / 흰 구름은 그윽한 골짜기에 가득하구나 // 산에 사는 사람이 혼자서 어두운 밤길을 걷노라니 / 개울물은 찬 옥구슬 구르듯이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붓 가는대로 쓰다]로 번역된다. 할 일 없이 극적거리면서 아무렇게나 쓰는 글씨를 낙서라 한다. 정성드려 붓글씨를 연속해서 쓰면 일종의 연습이다.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글씨를 쓰기는 쓰지만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씨를 아마 종필이 아닐까 본다. 사전적인 의미야 더 두고 라도 이런 정도의 의미가 더 적절할 것 같다. 소동파(蘇東坡:1036~1101)의 [縱筆(종필)]에서는 아예 ‘붓을 놓다’는 의미로 쓰여서 그 의미가 다양해 보인다.

 시인은 시상에 따라서 붓가는 대로 글을 써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맑은 바람에 소나무들은 물결을 치듯이 움직이고, 흰 구름은 그윽한 골짜기에 가득하구나 라는 시상을 일으켰다. 선경치고는 담아내고 싶은 한 아름의 시심을 아낌없이 표출해 낸 것으로 보인 작품이다. 소나무와 흰구름이라는 시적상관물이 잘 대비된다.

 화자는 후정의 한 소쿠리를 움푹 담아 정스러운 시상의 종이 위에 채워 넣었다. 산에 사는 사람 혼자서 어두운 밤길을 걷노라니, 개울물은 찬 옥구슬 구르듯이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고 했다. 개울물이 옥구슬 구르듯이 했다는 시가 되고 문학적 상상력이 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소나무들 물결치고 흰 구름만 가득하네, 산 사람은 밤길 걷고 개울물은 울어대고’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다른 호는 존재(存齋)라고 했다. 흔히 고봉선생으로도 불렀다 한다. 아버지는 고진이고 어머니는 강영수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은 그의 계부다. 이황의 문인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한자와 어구】

淸風: 맑은 바람. 動: 움직이다. 물결이 치다. 萬松: 많은 소나무. 白雲: 흰 구름. 滿: 가득하다. 幽谷: 그윽한 골짜기. // 山人: 산에 사는 사람. 獨: 홀로. 夜步: 밤에 걷다. 溪水: 시냇물 소리. 鳴: 울다. 소리를 내다. 寒玉: 찬 옥구슬이(구르듯이). 옥구슬이 소리를 내는 소리. 옥구슬이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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