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비마을은 3곳에 걸쳐 청동기 시대 유물인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사진은 위에서 부터 마을 전경, 왕바위, 문성제, 마을공동 우물, 지석묘, 서천 등이다.
각비마을은 3곳에 걸쳐 청동기 시대 유물인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사진은 위에서 부터 마을 전경, 왕바위, 문성제, 마을공동 우물, 지석묘, 서천 등이다.

각비마을은 동천과 서천 사이에 형성된 광양읍 삼각 퇴적지에서 서천을 따라 연결되는 계곡평지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광양읍 우두마을 앞에 마련된 지석교를 건너 지곡마을삼거리 좌측으로 500m정도 가면 마을이 나온다. 각비마을과 지곡마을이 통하는 세갈림 길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쪽 마을 앞 도로를 ‘왕바위길’이라 한다.

■마을유래

각비마을은 지석묘 44기가 대량으로 분포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에 이미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 내역은 알 수 없고 문헌상 기록에 의한 마을 연혁을 살피면 1600년경에 광양현 북면(北面) 며내리(㫆內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며내면(㫆內面)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며내면 지곡촌(紙谷村) 지역이었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봉강면 각비리(却飛里)로 문헌상 마을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각비마을은 정확한 설촌시기와 입향조는 알 수 없다. 마을이름은 풍수지리상 뒷산과 마을의 형국에 의미를 부여해 각비(却飛)라 이름했는데 ‘날아가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번창하다, 융성하다’는 뜻을 지녔다고 전한다. 

마을은 현재 봉강면 지곡리(紙谷里)에 속한다. 지곡리의 이름유래는 옛날 이 지역에 지소(紙所)가 있었으므로 ‘지실’ 또는 ‘조곡’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시 지곡리(紙谷里), 각비리(却飛里), 작정리(鵲亭里), 사우리(四友里), 보운리(普雲里), 토점리(土店里)를 병합해 지곡리(紙谷里)라 했다.

■각비마을 지석묘군 

각비마을은 3곳에 걸쳐 청동시시대 유물인 44기의 지석묘가 군집되어 있다. 첫 번째 지석묘군은 각비마을 입구에 마련된 문성제(父星齊)라는 제각과 마을 사이에 있는 소나무 인근에 있다. 이 지역에는 36기의 지석묘가 대군집을 이루며, 해발 407m의 산기슭 및 경사면에 위치한다. 이 지석묘들은 모두 중·소형이며, 대형의 괴석형 상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두 번째 지석묘군은 마을 뒤 산기슭의 밋밋한 경사면에 약간의 대지를 조성한 후 축조한 것이다.

첫 번째 지석묘군에서 북서쪽으로 약 70m 떨어져 있고 해발 40~50m 정도에 있다. 상석의 형태는 장타원형이고, 장축방향은 동-서이며, 상석의 서쪽에 구멍이 있다. 상석의 크기는 300×200×100cm이다. 

상석은 잘 정제되어 있으며, 상석 아래에 대형 지석 4개가 고이고 있는 남방식 지석묘이다. 이 지석묘는 형태면에서 가장 잘 정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크기도 가장 큰 것이어서 주변의 지석묘군과 어떤 관련 또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지석묘군은 마을 서쪽 산기슭을 따라 난 동석마을로 가는 소로변 아래 밭에 있다. 

동석마을로 넘어가는 길가에 마을 공동 우물이 있는데 이곳에서 20m 정도 떨어진 밭에 지석묘가 있다. 각비마을 두 번째 지석묘군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60m 정도 떨어져 있다. 세 번째 지석묘군은 모두 7기의 상석인데, 4기는 땅에 매몰되어 있고 3기에는 지석이 고여 있다. 

이 유적의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은 대부분 무문토기편이며 각비 지역 지석교 축조집단과 관련된 생활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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