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광장은 민간에 불하되면서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사진 위) 1948년 당시 미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화신광장 모습. (본문 및 사진 출처 -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화신광장은 민간에 불하되면서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사진 위) 1948년 당시 미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화신광장 모습. (본문 및 사진 출처 -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822∼826일대는 화신광장으로 광양의 근대사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의 공간이다. 

현재 읍내리 광양역사문화관 앞쪽 삼진수도와 가교인력 사이로 들어가는 골목과 대덕유료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연결된 북쪽 상가 부지에 1,000여 평의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이 화신광장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광양지역의 공공 행사가 많이 열렸던 곳이었다.

6·25가 끝나고 지자체가 돈이 부족해 1958년, 민간에 땅을 불하(拂下)하면서 상가 건물이 들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됐다.

이 일대는 주요 관공서가 밀집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시장터로 각종 집회가 열리면서 사건들이 전개된 장소인 동시에 광양의 주요 문화공간이었다.

1945년 8월 17일 광양서국민학교에서 ʻ해방축하군민대회ʼ를 마친 군민들은 화신광장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1945년 11월 경에는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군수(김상수)에 대한 인민재판이, 12월 30일에는 광양인민위원회가 주최한 ʻ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대회ʼ가 개최됐다.

또 1948년 10월과 1949년 9월 16일에 토벌군과 경찰은 이곳에서 전시행정을 벌였다. 

이곳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욕보이거나 공개처형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사람을 죽여서 매달아 놓기도 하고 잘린 머리를 발로 차기도 했다고 한다. 

6·25전쟁 국면에서도 화신광장은 인민군, 인민위원회, 토벌군, 경찰 등에 의해 위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단은 화신광장은 광양의 현대사에서 많은 정치·사회적 사건들이 전개되었고, 집회가 열렸던 매우 중요한 역사 현장으로 정확한 고증과 복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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