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치재는 여순사건 당시 봉기군과 진압군의 교전 현장이자 민간인 집단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현재 모습과 (사진 위) 1948년 당시 미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송치재. (본문 및 사진 출처 -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송치재는 여순사건 당시 봉기군과 진압군의 교전 현장이자 민간인 집단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현재 모습과 (사진 위) 1948년 당시 미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송치재. (본문 및 사진 출처 -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광양시 광양읍 죽림리 57-8번지 일원의 솔티재(송치재)는 여순사건 기간 동안 전투와 민간인 집단 희생이 일어난 장소다.

행정리상 솔티재(송치재)는 광양읍 죽림리 직동마을이지만 골약면과 경계에 위치한다.

여순사건이 막 발발된 1948년 10월 22일 경, 마산에 주둔하던 제15연대가 광양으로 지원을 오던 중 솔티재 양쪽 야산에 매복해 있던 봉기군의 기습으로 연대장 최남근 등이 생포되고, 다수의 군인들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15연대의 광양 진입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주에 주둔하던 12연대를 투입하면서 진압에 나섰다. 

봉기군 일부가 봉강면으로 들어와 조용래(38세, 부면장)에게 전단지를 돌리라는 등 협조를 요구했다. 이 일로 첫 번째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다.

1948년 11월 11일 경 경찰토벌대가 봉강면 지곡리로 들어와 마을회관에 주민들을 소집하고 조용래 등을 트럭에 싣고 가 광양읍 솔티재(금단마을 골짜기)에서 사살했다. 

약 3일 후 가족들은 솔티재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당시 대한청년단원으로 연행 과정과 조용래의 시신을 목격한 정 모씨(당시 25세)는 조용래가 토벌군 전단지 배포를 거부했는데도 경찰에게 연행됐다고 진술했다.

두 번째 민간인 희생은 1949년 9월 21일 경찰토벌대가 광양읍 솔티재 계곡에서 주민 30여 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에서 옥곡면 묵백리 주민 변은약(36세), 이강현(26세), 이만수(46세), 이강석(29세, 이강현의 형) 등이 사살됐다. 

당시 솔티재 인근에 살던 참고인 한 모씨(당시 26세)는 솔티재에서 총소리를 듣고 현장에 갔더니 약 30~40구의 시신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광양경찰서 보안기록조회 회보서 및 신원기록편람 처형자 명부에 이만수, 변은약, 이강현은 사살된 자로 등재되어 있다.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단은 솔티재(송치재)에서 한 차례 전투와 두 차례의 학살이 이루어진 아픈 역사를 가진 만큼 안내표지판 설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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